항목 ID | GC00401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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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一新財團 |
영어공식명칭 | Ilsin Foundation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판근 |
성격 | 교육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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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20년 3월 |
해체연도/일시 | 1939년 4월 6일 |
설립자 | 허준|김기태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던 교육 단체.
[개설]
3·1운동 이후 민족자각(民族自覺)의 기운이 일어날 무렵, 경상남도의 유지들은 조국의 독립이 오직 인재양성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민족재단을 세워 교육사업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설립목적]
조선의 독립과 인재양성을 위하여 설립되었다.
[설립경위]
1919년 11월 진주군 지수면의 부농 허준(許駿)이 5백석짜리(당시 7만원 상당) 토지를 교육사업에 제공할 뜻을 아들 허만정(許萬正)을 통하여 전하였고, 김기태(金祺邰), 박재표(朴在杓), 정상진(鄭相珍), 강주수(姜周洙), 박재호(朴在浩), 강위수(姜渭秀), 이현보(李鉉補) 등이 수차례의 회의를 거듭한 끝에 1920년 3월 정식으로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변천]
1922년 제1회 설립자 총회를 열어 재단법인 설립허가 신청하였으며, 이사장 김현국(金炫國)을 선출하고 이사, 감사를 각각 선임하였다. 1923년 1월 수속을 끝내고, 3월 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아냈다. 1939년 4월 6일 진주공립고등여학교가 설립됨으로써 일신재단은 해산되었다.
[활동사항]
1919년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를 설립키로 합의하였고, 1923년 10월 사립 진주일신고등보통학교 설립허가를 받았으나, 일제에 의하여 1923년 11월 취소되었다. 결국 일신고등보통학교의 설립을 포기하고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세우기로 방향을 바꿔 1924년 4월 25일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세웠다.
당시 사립학교 재단기금 50만원을 모금하기 위하여 범도민적(汎道民的)으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3년 동안의 모금운동으로 45만원의 거액을 모으게 되었고, 나머지 5만원은 통영의 김현국(金炫國)이 기부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하였다.
[현황]
1939년 재산 총액은 토지, 임야, 채권을 합하여 45만 7692원 19전이었고, 기본재산자본은 토지, 임야, 채권을 합하여 35만 8192원 89전으로 차액은 학교시설인 9만 9500원이었다.
[조직]
기성회의 구성원은 고문에 김기태(金祺邰) 등 2명을 추대하고, 회장에 박재호(朴在浩), 부회장에 강위수(姜渭秀), 간사장에 이현보(李鉉補)가 선임되었다. 1939년 해산 당시 임원은 이사장에 김기태(영구임기), 상무이사에 강주수(姜周秀), 김두관(金斗貫), 조주흡(趙住翕), 평의원에 김동식(金東式), 서상필(徐相弼), 최두환(崔杜煥), 장응상(張鷹相), 이사량(李思兩), 감사에 장성용(張成龍), 조진석(趙鎭錫), 허협(許協)이었다.
[의의와 평가]
경상남도 진주지역의 민족자본만으로 학교를 세우기 위하여 지역민이 하나 되어 이루어낸 결과로, 국가의 자주독립을 성취하기 위하여 교육사업에 그 뜻을 두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이러한 노력들은 민족의 커다란 긍지로 남아 한국교육사에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