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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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東學農民軍 |
영어음역 | Jinju Donghak nongmingun |
영어의미역 | Donghak Army in Jinj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형목 |
[정의]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농민군.
[개설]
한반도를 둘러싼 청·일간 각축은 마침내 청일전쟁으로 진전되어 일제의 독점적인 지배가 시작되었다. 한편 보수적인 지배층은 심각한 상황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1894년 9월 진주지역 농민군은 농민적 토지소유와 부패한 탐관오리를 추방하여 ‘농민의,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새로운 지배체제와 외세를 배격하여 자주적인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1862년 농민운동 이념을 계승 발전시킨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변천]
정부는 대구판관 지석영(池錫永)을 포토사로 현지에 급파함으로써 농민군 분열을 획책하였다. 일본은 이미 하동 함락의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군대를 파견하는 등 조선 점령을 위한 행동을 개시하였다. 관군과 일본군은 연합진영을 형성하여 동학농민군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진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은 10월 10일 곤양 금오산(金鰲山)전투와 진주 고승(高僧)산성전투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이후 산발적인 활동을 도모하였으나 재기하지 는 못하였다.
[활동사항]
1894년 9월에 접어들면서 진주군 마동리 등지의 동학도는 매일 집회를 개최하면서 악덕 지주 등에게 사형(私刑)을 가하였다. 이들은 진주초차괘방(晋州初次卦榜)을 내걸어 조직적으로 주민을 동원하였다. 9월 8일 7천여 농민들은 일제히 읍내 시장가로 모여들었고, 지휘부인 충경대도소(忠慶大都所)도 설치되었다.
충경대도소는 통문을 발하여 각 동·이장은 자기 지역의 민폐를 교정할 것과 지역민을 동원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어 「경상우도 각 읍촌에 사는 대소민에게」라는 괘방을 내걸어 왜적의 침입을 징벌하고자 진주에서 대회를 가졌다는 것, 동학도에 호의적인 병사가 갈리고 왜와 조약에 따라 새로운 병사가 부임을 막을 것, 사사로이 토색하는 자는 대도소로 신고할 것 등을 내걸었다. 이들은 읍폐를 교정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읍내에서 집회와 장시에서 장막을 설치하는 한편 인가를 불태운다든지 동헌에 침입하여 관장을 핍박하고 죄수를 석방하였다. 특히 이들은 김인배(金仁培)가 지휘하는 호남동학군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았다.
9월 17일 동학군은 진주성을 완전히 점령한 후 각지 포(包)를 설치하는 등 독자적인 행정력을 발휘하였다. 또한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자신들의 항거 의지도 분명하게 천명하는 등 대대적인 민폐교정에 착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진주동학농민군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로 각 고을 차원의 폐정개혁과 향리·토호·사찰 등 민중을 수탈한 계층·세력에 대한 징벌을 감행하였다. 동헌에서 관헌에 대한 핍박, 원성의 대상인 인물의 집이나 사찰에 대한 방화 등은 이를 반증한다. 주로 수탈에 편승한 향리·토호는 직접적인 공격대상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폐정개혁안은 알 수 없지만, 인근 곤양의 7개조나 고성의 8개조 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둘째는 민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다. ‘척왜양’의 전면적인 제기는 민족문제와 불가분의 관련성을 지닌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의 발로나 일본에 우호적인 개화세력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은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진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농민군 활동은 인근지역과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주장을 실천에 옮겼다. 곧 진주동학농민군은 만연한 부패척결과 반외세 지향한 민족운동이었다. 잔존한 농민군은 이후 영학당(英學黨)·활빈당(活貧黨)으로 계속하면서 이러한 이념을 실천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