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21 |
---|---|
한자 | 國債報償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하지영 |
[정의]
1907년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일제의 강제적 차관 제공에 저항하며 일어난 국권회복운동.
[역사적 배경]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통감부가 설치되자 일제는 강제로 차관을 들이며 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1907년 국민의 힘으로 일본의 차관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밀양의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5월 19일 뜻있는 인사들이 유림들의 모임 장소인 연계소(蓮桂所)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밀양에서의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을 추진하던 밀양군 대표들은 1907년 5월 19일 며칠 뒤인 밀양 읍내 장날 ‘응향문(凝香門)’ 앞에서 국채보상운동에 관한 일장 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에는 남녀귀천이 없으며 10전 20전이라도 힘을 모아 국가 진흥을 도모’해야 한다는 내용의 「밀양군경중광고문(密陽郡境中廣告文)」을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며 전국에 의지를 보였다. 그 결과 상서면(上西面), 하서면(下西面), 상남면(上南面), 하남면(下南面), 북면(北面), 천화산외면(穿火山外面), 단장면(丹場面) 등 여러 면에서 호응하였다. 특히 광주안씨, 여주이씨, 밀성손씨 3성의 문중이 주축이 된 전통적 사족이나 향반 계통의 유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단장면에서는 표충사(表忠寺)의 승려들까지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