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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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密陽卞氏 |
영어공식명칭 | Milyang Byunssi|Milyang Byu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태수 |
본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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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시조 | 변고적 |
입향 시조 | 변계량 |
[정의]
변고적을 시조로 하고 변계량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밀양시의 세거 성씨.
[연원]
변씨(卞氏)는 원래 중국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 숙진(叔振)이 처음 조(曺)나라에 봉해졌다가 후에 노(魯)나라 변읍(卞邑)에 봉해지자 지명(地名)을 따서 변씨라고 한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변씨는 당(唐)나라 천보년간(天寶年間)[742~755]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변원(卞源)이 동래(東來), 신라(新羅)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즉, 743년(경덕왕 2) 신라 사신이 기강(沂江)을 거쳐 성도(成都)에 이르렀을 때에 현종(玄宗)이 당의 학사 8인에게 『효경』 1질을 하사하여 신라에 가서 『효경』을 가르치고 시례(詩禮)를 숭상하라는 명을 내리자, 변원이 중랑장(中郎將) 노충국(魯忠國), 한림(翰林) 노오(盧塢) 등 7인과 신라로 건너갔다.
그 후의 세계(世系)가 실전되고 상계(上系)를 고증할 문헌이 없어 고려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을 초계(草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는데, 시조 변정실의 아들 변광(卞光)[長派]·변요(卞耀)[仲派]·변휘(卞輝)[季派] 삼형제를 기점으로 크게 3갈래로 갈라졌다.
장파인 변광의 후손은 주로 영호남 지방에 많이 살며, 전체 변씨 인구의 6할을 차지하고 있다. 변요의 후손인 중파는 경상남북도에, 변휘의 후손인 계파는 합천군(陜川郡)을 중심으로 많이 세거하고 있다.
시조의 둘째 아들인 변요의 손자 변고적(卞高迪)이 1140년경 밀양(密陽)에 입촌하여 분적되었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초계, 밀양 외에도 원주(原州)·팔계(八溪)·진주(晉州)·청주(淸州)·경주(慶州)·장성(長城)·남원(南原) 등 44개 파로 분관(分貫)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종의(宗議)에 따라 합보(合譜)를 하고 대종회(大宗會)도 함께 하고 있다.
[입향 경위]
변정실의 둘째 아들인 변요의 손자 변고적이 1140년경 밀양(密陽) 초동 구령 대고지[대구말]에 입촌하여 시거(始居)함으로써 밀양변씨(密陽卞氏)로 분적되었다.
[인물]
대표적인 인물 중에는 변옥란(卞玉蘭), 변계량(卞季良), 변종인(卞宗仁), 변상벽 등을 들 수 있다.
상호군(上護軍) 변원(卞原)의 아들인 변옥란은 고려 공민왕 때 각 조(曺)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이성계를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변원의 셋째 아들 변계량은 고려 말에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글을 배워 14세에 진사시에 올랐다. 1385년(고려 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예조판서(禮曹判書)와 참찬(參贊) 등을 지내며 태종(太宗) 때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그 후 약 20년에 걸쳐 대제학을 지내면서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고 『고려사(高麗史)』를 개수(改修)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문장과 시에 뛰어나 당대 제일인자로 손꼽혔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후세의 야사(野史)에 많이 오르내렸다.
변계량의 형 변중량(卞仲良)도 시문에 뛰어나 아우와 함께 문명을 날렸으며 이원계(李元桂)[이성계의 이복형]의 사위로서 고려 말에 문과에 올라 밀직사(密直使)를 지내고 조선이 개국한 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는데,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 일파로 몰려 이방원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변예생(卞禮生)의 아들 변종인(卞宗仁)은 변중량의 현손(玄孫)으로 세조(世祖) 때 문과에 올라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당상관(堂上官)이 되었으며, 성종(成宗) 때 북변(北邊)에 침범한 오랑캐를 막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그 후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를 거쳐 각 도(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내면서 국방 강화에 크게 공헌하고, 연산군(燕山君) 때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한성판윤(漢城判尹) 변남룡(卞南龍)의 아들 변효문(卞孝文)은 태종(太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고 세종(世宗)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내면서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와 『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하였고, 최치운(崔致雲)·이세형(李世衡) 등과 함께 『신주무원록(新譸無寃錄)』을 편찬하였다.
변효문의 증손(曾孫) 변형량(卞亨良)이 김종직(金宗直)에게 글을 배워 연산군(燕山君) 때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로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무장(茂長)에 유배되었다가 효수(梟首)당하였다. 변승세(卞承世)의 아들 변훈남(卞勳男)은 명종(明宗) 때 여러 관직을 거쳐 현령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선조(宣祖) 때 승군(僧軍)으로 참전하여 임진왜란에 공을 세운 변헌(卞獻)은 시, 서에 뛰어나 포의(布衣)로서 명(明)나라에 들어가 글씨로 명성을 날렸다. 변연수(卞延壽)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이순신(李舜臣) 휘하에 들어가 옥포해전(玉浦海戰)에서 공을 세우고 당포(唐浦)에서 아들 변립(卞岦)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여 고향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현황]
밀양변씨는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1985년에는 4,088가구 1만 7288명, 2000년에는 5,298가구 1만 6911명, 2015년에는 1만 8750명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밀양군 초동면 신호리에 향림에서 세운 변계량의 유허비와 성만리 소구령 저수지 길가 언덕에 춘정 선대의 6위 단소를 설치한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