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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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星州李氏 |
영어공식명칭 | Sungjoo Leessi|Sungjoo Le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노규현 |
본관 | 성주 - 경상북도 성주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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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관동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 |
성씨 시조 | 이순유 |
입향 시조 | 이순년 |
[정의]
이순유를 시조로 하는 경상남도 밀양시의 세거성씨.
[연원]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시조(始組)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재위 924~927] 때 재상(宰相)을 지낸 이순유(李純由)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이순유는 아우 이돈유(李敦由)와 함께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고 손위(遜位)하자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이극신(李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지금의 성주면 경산동]으로 옮겨 가 살았다. 고려 태조는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 하고는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그 곳에서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며 호장을 맡아 왔다.
그 후 이순유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호장을 역임하였고, 이장경의 아들 오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후 관직에 올라 나라에 공을 세웠으므로 삼중대광좌시중도첨의정승지전리사 상호군(三重大匡左侍中都僉議政丞知典理事上護軍)에 추증되고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특히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元)나라에서 등과하고 나라에 공을 세워 원나라 황제가 이승경의 할아버지를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하였다. 그리하여 이장경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면서 중흥조(中興祖)인 이장경이 농서군공에 추봉되었으므로 농서이씨(隴西李氏)라고도 하였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개칭된 성주목(星州牧)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입향 경위]
시조의 17세손 이순년(李舜年)이 세조 때 상남 무량원에 시거한 이래 상남 조음리 관동에 후손들이 세거한다.
[인물]
고려 때 이승경은 평장사가 되어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이만년(李萬年)을 비롯하여 이포(李褒), 이인부(李仁復), 이인임(李仁任)은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이인민(李仁敏)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서 개국공신 2명을 냈고, 문과 급제자 107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이발(李潑)은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이숭문(李崇文)을 비롯하여 이지활(李智活)과 이지원(李智源), 이견기(李堅基), 이집(李諿) 등은 이조판서에 올랐다. 이직(李稷)은 병조판서와 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에 이르고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이의(李誼)와 이자건(李自建) 등은 대사헌이 되었다. 이외에도 수많은 승지와 부사, 현감 등이 배출되었다.
이조년(李兆年)은 1285년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하였고 다시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이조년은 인품이 근엄하고 곧아서 충심으로 간언하는 일이 많았고 시문에 뛰어났다고 한다. 이문건(李文建)은 151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죽자 화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옛 친구나 문하생들이 조문을 못하였는데, 이문건은 조문하고 통곡하여 9년 동안 과거를 못 보았으나 청백하기로 유명하였으며 글씨에 뛰어났고 부모의 묘소에 처음으로 직접 써서 세운 한글비는 유명하다.
구한말에 와서는 이종린(李鍾麟)은 문필가로도 유명하였지만, 항일 민족 언론 투쟁에 선도적 역할을 했는데 『조선독립신문』의 간행으로 3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경암(敬菴) 이환(李瓘)은 천도교령(天道敎領) 손병희(孫秉熙)의 명을 받아 이종일(李種一) 등과 「3·1 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이종일은 『경성신문』의 논설로, 『황성신문』 등의 논객으로 활약하였고, 천도교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유명한 「3·1 독립선언서」도 이종일이 경영하는 인쇄소에서 찍은 것이다. 이후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고 옥고를 치루었고,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이 되어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한 공으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현황]
성주이씨는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1985년에는 3만 7251가구 15만 3146명, 2000년에는 5만 8134가구 18만 6188명, 2015년에는 20만 3703명으로 조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