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7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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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敬老 |
영어음역 | Kim Gyeongro |
이칭/별칭 | 성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송만오 |
[정의]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숙(惺叔). 고려 때의 판서(判書) 수은(樹隱) 김충한(金沖漢)의 후손이며, 현령(縣令) 김원(金騵)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김경로는 어릴 때부터 여력이 출중하고 총명하여 열심히 경전을 읽었으나, 중년에 안질로 인하여 학업을 중단하였다. 문무의 실력을 견줄 만했던 황진(黃進)과 같이 1576년(선조 9)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김경로는 비변랑을 거쳐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경로는 경상조방장(慶尙助防將)으로 있었는데, 금산으로 적이 쳐들어오자 그 곳으로 나아가 수십 명의 적병을 베었다.
그리고 선조가 피난한 의주로 달려가니 선조가 매우 칭찬하고, 황해방어사(黃海防禦使)에 임명하였다.
1593년(선조 26) 정월에 평양방어사 이시언(李時言)과 더불어 평양으로부터 후퇴하는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퇴로를 막고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전공을 세워 다시 전라방어사로 전입되었다.
그 후 1597년(선조 30) 정월 재침략을 감행한 왜적이 여세를 몰아 남원성을 향하여 공격해오자, 전주에 머물러 있던 김경로는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담양 금성산성으로 달려가 진을 치고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한편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의 구원병 요청을 받고 남원성을 향하여 진군하던 도중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동계면 감밭에서 합세하였다. 그는 임사미(林士美) 등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원 교룡산성을 거쳐 남원성으로 입성하였다.
이때 11만 명의 왜군이 남원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김경로는 이복남 및 오응정(吳應鼎)과 함께 북문을 지켜 분전하였으나, 접전이 개시된 8월 13일 이후 전세가 크게 악화되었다.
그러자 김경로는 이복남·오응정·이원춘 등과 함께 풀더미 속으로 들어가 종사에게 불을 붙이게 하고, 불길 속에서 태연히 순절하였다. 이것을 목격한 부하들은 총과 칼을 들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다함께 순절하였다. 이 날이 바로 8월 16일이고 당시의 나이 51세였다.
[묘소]
이 싸움에서 남원성은 적에게 함락되었고 군관민 1만 여 명이 함께 죽었는데, 지금 이들의 무덤을 ‘만인의총(萬人義塚)’이라 하여 관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김경로는 남원 사림들에 의해 충렬사에 배향되었고, 조정에서는 자헌대부 한성판윤(資憲大夫 漢城判尹)을 증직(贈職)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