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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1948
한자 李花中仙
영어음역 Yi Hwajungseon
이칭/별칭 이봉학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동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판소리 명창
출신지 전라남도 목포시 남교동 12[만세로 3-2]
성별
생년 1899년 10월 12일연표보기
몰년 1944년 1월 1일연표보기
본관 전주

[정의]

전라북도 남원에서 활동한 여성 판소리 명창.

[개설]

이화중선은 근대 판소리 여류 명창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물이다. 1920년대에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1930년대 판소리의 부흥기에 많은 음반을 냈다. 자신의 인기를 바탕으로 협률사를 조직하여 전국을 순회하기도 하였다. 판소리의 생존이 대중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개화기 이후 1944년 해난 사고로 죽기까지, 대중의 취향에 부응하는 슬픈 소리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활동사항]

이화중선의 출생지는 호적상 목포로 되어 있다. 5살 때 벌교로 이사하여 10살까지 살았다. 13살 때 남원으로 이사하였으며, 남원권번에 기적을 두고 판소리를 배웠다. 이때 수지면 박씨 문중의 박해창이 머리를 올려주었다.

15살 때 장득진의 첩으로 출가하여 남원을 오가며 소리를 하다가, 17살 되던 해에 본격적인 소리 공부를 위해 장득진의 고향인 순창군 적성면으로 이사하여 약 5년간 소리 공부를 하였다.

23살에 상경하여 활동을 시작한 이화중선은 26살 때인 1924년 조선물산장려회 주최 전국명창대회에서 「심청가」 중 ‘추월만정’을 불러 당시 최고 명창으로 대접받았던 배설향을 제치고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송만갑에게도 배웠다.

1927년과 1928년에는 빅터(Victor), 콜럼비아(Columbia) 등의 음반 회사에서 녹음을 하였고, 1928년 장득진이 사망하자 임실군 오수에 내려와 지내다가, 1931년 오수 사람 이재삼과 혼인을 하였다. 1932년부터 다시 서울에서 활동을 재개하였고, 1934년에는 조선성악연구회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후 여러 음반 회사에서 많은 음반을 냈다.

1944년 1월 1일 이화중선은 한국 노무자 위안 공연차 일본에 갔다가 나카사키 현에서 배가 뒤집혀 사망하였다. 오수에 묘가 있다. 이화중선은 노력 끝에 얻은 공력보다는 타고난 성대로 쉽게 소리를 하는 소리꾼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술 및 작품]

「명창 이화중선 판소리 선집」(서울음반, CD), 「SP시대의 판소리 여류 명창들」(신나라뮤직, CD), 「빅터판 춘향가」(신나라뮤직, 3CD), 「롬비아판 춘향가」(신나라뮤직, 2CD), 「이화중선」(한국의 위대한 명창들 3집, 신나라뮤직, CD), 「이화중선」(명인명창선집 2집, 유니버설, CD), 「자매명창 이화중선, 이중선/김초향, 김소향」(서울음반, CD), 「음반으로 보는 남원 동편제 판소리의 전통과 세계」(국립민속국악원, CD) 등의 작품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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