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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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畿湖儒學-中心論山 |
영어의미역 | Nonsan, the Center of Neo Confucianism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경수 |
[개설]
‘충절과 선비의 고장’, ‘양반의 고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충청도, 그 이미지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충청 지역을 대표하고 있으며 강한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러한 상징의 연원은 조선시대 가장 오랜 기간 정권을 잡고 있었던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존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중심에 논산에서 뿌리내린 호서 사족의 활약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이는 기호 유학을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논산의 사족과 이곳에서 만개한 유학을 살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조선 중기 충청도 사족들의 학맥은 대부분 논산 출신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과 연을 맺고 있었다. 김장생은 아버지인 김계휘(金繼輝)가 강학했던 정회당과 자신이 세운 양성당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제자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초려 이유태, 탄옹 권시, 장유, 최명길, 신흠, 이경석 등 실로 그 이름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다. 기호 사림에 종속되어 별다른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던 충청도의 호서사림은 김장생의 출현으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그 중심이 김장생의 근거지였던 논산이었다.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서, 특히 유교 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 또는 신분 계층을 가리킨다. 선비 문화의 전성기인 조선시대에 충청도는 선비 문화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의 유학은 크게 영남 유학과 기호 유학으로 대별되는데, 조선 후기 기호 유학의 중심은 충청도였다. 조선 후기 300년 동안의 중앙 정계는 대체로 기호 세력이 주도하였는데, 기호 세력 가운데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적통을 계승한 김장생·김집·송시열·권상하 등이 모두 충청도 출신이었던 것이다.
[기호학파 종사 조광조]
기호학맥에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조광조(趙光祖)이다. 그는 영남 사림의 종장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기호 출신이기 때문에 기호학파의 종사가 되기도 한다. 조광조를 독향한 경기도 양주의 도봉서원에 송시열을 추배하고자 노론 측에서 집요하게 노력한 것도 사실은 기호 사림의 전통이 조광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식의 표현이다. 조광조의 학통은 이이로 연결되었다.
[기호학파 인물들]
기호학파는 이이·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등이 주류가 되어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이들 가운데 기호학파의 적통을 계승한 인물이 논산의 김장생이었다. 김장생 문하에서 약 300여 명,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약 200여 명의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일부는 양 문하에서 동시에 수학한 인사도 있었다. 문하생 가운데 특출한 이는 송준길·송시열·유계·이유태·윤선거 등 충청 5현이다. 학파의 적통은 이이→김장생→김집으로 이어지는데 학문적인 특성은 예학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이 그 이해가 깊어져 이를 체계화하고 이론화함에 따라 현실적인 실천의 예는 이론의 예로 의식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양난 후의 혼란한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성숙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장생은 정암 조광조의 덕치, 퇴계 이황의 도학, 율곡 이이의 학문, 우암 송시열의 의리와 더불어 ‘예학’으로 이른바 ‘조선조 5현’으로 추앙받아왔다. 뿐만 아니라 김장생은 이이, 송익필의 적전(嫡傳)으로 기호 유학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율곡학파의 문호가 넓어지고 본격적으로 융성하게 된 것은 논산 출신의 김장생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조선 성리학은 16세기 퇴계와 율곡의 활약에 힘입어 주자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었고, 조선적 유학이라고 할 만큼 깊이 연구되었다. 17세기에는 임진왜란 이후 실학이 대두하기 전 100년간을 ‘예학시대’로 규정할 만큼 예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17세기 예학은 가례를 시행하기 위한 이해 차원을 넘어 예제를 철저하게 고증하여 예의 근본 정신을 확립하고, 당시 상황에 합당한 예제 정립을 추구하였다. 예학의 바탕 위에 도학자들은 몸소 엄격하고 철저하게 예를 실천하였으며, 당시의 불합리한 예제를 현실적으로 비판하였다.
[한국 예학의 종장 김장생]
이 시기에 예학의 문을 연 사람이 논산 출신의 사계 김장생이다. 김장생은 율곡 이이의 성리학을 계승하고 예학을 정립하여 한국 예학의 종장이 되었으며, 제자인 송시열은 춘추 정신의 사표가 되었다. 즉 조선 중기 이후 성리학이 극성을 이룰 때에 그 발판 중 기호 성리학의 근거가 충청도 논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예학적 관심은 단순한 행용(行用)에 만족하지 않고, 예를 왜 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리학적 이해까지 얻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전과 달리 예에 대한 기본 인식과 실천의지가 달라졌고, 관습적 예의 실천보다 더 합리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점이 기호 유학의 중심, 논산 ‘사계 예학파’의 특징이었다.
[논산의 향교와 서원]
향교와 서원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립되었던 교육기관으로 유교적 사회 분위기 조성과 교화, 인재 양성을 위한 기반으로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기호 유학과 예학의 본 고장인 논산에는 조선시대의 유교 교육기관인 서원과 향교가 많이 건립되었고 현재도 상당수 보전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연산·니산(노성)·은진이 합쳐진 논산에는 연산향교·노성향교·은진향교 등이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서원은 전국에 900여 개가 세워졌는데, 논산 지역에는 사액서원으로 돈암서원·노강서원·죽림서원 등이, 그밖에 구산서원·금곡서원·봉곡서원·충곡서원·행림서원·효암서원·휴정서원과 궐리사 등이 건립되었다.
이상과 같이 볼 때 논산은 과거 수백 년간 선비의 고장으로 조선시대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서원과 향교 등 유교 문화 자원 역시 상당히 많이 남아 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사실은 논산이 선비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무엇보다 기호 유학의 중심지로서의 역사적·문화적·사상적 정체성을 지녔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