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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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昌協 |
이칭/별칭 | 중화(仲和), 농암(農巖), 삼주(三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준호 |
출생 시기/일시 | 1651년 - 김창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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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69년 - 김창협 진사시에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682년 - 김창협 증광 문과에 전시 장원으로 급제 후 전적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689년 - 김창협 영평에 은거 |
몰년 시기/일시 | 1708년 - 김창협 사망 |
출생지 | 김창협 출생지 - 경기도 과천시 |
거주|이주지 | 김창협 거주지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 |
묘소|단소 | 김창협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
사당|배향지 | 석실 서원 - 경기도 남양주시 지금동 |
사당|배향지 | 녹동 서원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교동리 |
성격 | 문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안동(安東) |
대표 관직 | 청풍 부사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문신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증조할아버지는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며, 어머니는 해주 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인 안정 나씨(安定羅氏)이다.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이 형이고, 성리학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김창흡(金昌翕)이 동생이다.
[활동 사항]
김창협(金昌協)[1651~1708]은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 문과에 전시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하였다. 이어서 병조 좌랑·사헌부 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 좌랑·함경북도 병마평사·이조 정랑·사헌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 참지·예조 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청풍 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1692년(숙종 18) 영평(永平)[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농암 서옥(農巖書屋)을 완성하고 농암 수옥(農巖樹屋)이라 당호를 썼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남인이 축출되고 소론이 득세할 때 아버지도 신원(伸冤)되고 그도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그 후 잇따라 대제학, 예조 판서, 지돈령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모두 사퇴하였다. 만년에 양주의 삼호(三湖)에 서실을 짓고 이거하여 그곳을 삼주(三洲)라 명명하고 자호로 삼은 뒤 경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학문과 저술]
김창협은 학문적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四端)은 선(善)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다.”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다.”라고 하여 이황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지지하였다.
그는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도 “기의 맑은 것은 모두 선하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지만 탁한 기가 발(發)해된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악론변(性惡論辨)」에서 그는 “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었으며,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특히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 이단상 비(文貞公李端相碑)’와 ‘감사 이만웅 비(監司李萬雄碑)’, 「김숭겸 표(金崇謙表)」, ‘김명원 신도비 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을 남겼다. 저서로 『농암집(農巖集)』·『주자 대전차의 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論語詳說)』·『오자수언(五子粹言)』·『이가 시선(二家詩選)』 등이 있고, 편저로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문곡 연보(文谷年譜)』 등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 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 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