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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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聲大 |
이칭/별칭 | 이원(而遠)/율강(栗崗)/촌로(村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준호 |
출생 시기/일시 | 1622년 - 김성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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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695년 - 김성대 사망 |
출생지 | 김성대 출생지 - 경기도 장단군 |
거주|이주지 | 김성대 이주지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 |
묘소|단소 | 김성대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
사당|배향지 | 동음사 -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 |
성격 | 문신|효자 |
성별 | 남 |
본관 | 안산(安山) |
대표 관직|경력 | 제릉 참봉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지역에서 활동했던 효자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이원(而遠), 호는 율강(栗崗)·촌로(村老)이다. 경기도 장단군에서 출생했으며, 좌찬성 평호공(平胡公) 김개(金漑)의 6세손이다. 아버지는 사복 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좌승지에 증직된 김찬(金讚)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이다. 효자 김성발(金聲發)·김성옥(金聲玉)의 형이다.
[활동 사항]
김성대(金聲大)[1622~1695]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 제비울에서 살았다. 김성대는 어려서부터 인품이 뛰어나고 덕이 많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노쇠한 부모님을 모시고 백운산에 깊이 숨어서 살았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자 약제와 음식을 손수 마련하였으며, 아버지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판단하여 약을 쓰며 간호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형제간에도 우애가 극진하고 이웃과 친지들에게도 우의가 돈독하여 마을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넣어 얼마간 소생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몸이 연로하고 몹시 쇠약하여 자녀들이 극구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예에 따라 애통해하면서 상제로서 예를 다하였다.
김성대는 일찍이 과거 시험에 뜻을 두어 초시(初試)에 여러 차례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는 낙방하였다. 1693년(숙종 19) 72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는데, 숙종이 멀리서 바라보다가 “저기 늙은이는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고 물으니 주위에서 “진사시를 보러 온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숙종이 즉석에서 ‘촌로’라는 호를 하사하고 “늙은이가 먼 곳에서 왔으니 참봉이라도 하나 주어라.” 해서 개성에 있는 제릉 참봉으로 임명하였다. 2년 뒤인 1695년(숙종 21)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 백운산 아래에 있다. 김창집(金昌集)이 촌로묘표(村老墓表)와 묘갈명을 썼다.
[상훈과 추모]
1831년(순조 31) 3월 안산 김씨 문중에서 학덕이 높았던 그를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짓고 동생들과 함께 배향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1833년(순조 33)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에 동음사(洞陰祠)를 세워 김성대를 배향했으며, 후에 동생인 반성제(反省齊) 김성발(金聲發)과 동구(東邱) 김성옥(金聲玉) 그리고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인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을 추가로 배향하여 봄가을에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