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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106
한자 金平默
이칭/별칭 갑득(甲得),치장(穉章),중암(重菴),겸산(兼山),문의(文懿)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기도 포천시 화산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910년 - 김평묵 규장각 제학에 추증
추모 시기/일시 1974년 - 김평묵 미원 서원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910년 6월 - 김평묵 문의 시호 추증
출생 시기/일시 1819년 9월 6일연표보기 - 김평묵 출생
몰년 시기/일시 1891년 12월 20일연표보기 - 김평묵 사망
출생지 김평묵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화산면
수학|강학지 임장 서원 -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동막리
수학|강학지 김평묵 강학지 - 춘천 신천리
사당|배향지 미원 서원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선촌리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청풍(淸風)
대표 관직|경력 규장각 제학

[정의]

조선 후기와 개항기 포천 출신의 학자.

[개설]

김평묵(金平默)[1819~1891]은 최익현(崔益鉉) 등과 동문수학하였으며, 문하에서 홍재구(洪在龜)·유인석(柳麟錫)·유기일(柳基一) 등을 배출하였다.

[가계]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稚章), 호는 중암(重庵)·겸산(兼山). 6대조 김흥지(金興祉)가 포천 백운산으로 이거한 후 오랫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김도홍(金道弘)이고, 아버지는 김성양(金聖養)이며, 어머니 장수 황씨는 황근(黃瑾)의 딸이다. 아내는 수원 최씨(水原崔氏) 최경철(崔景喆)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평묵은 1819년(순조 19)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화산면의 시우촌에서 태어났다. 1823년(순조 23) 5세 때 처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6세에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었다. 7세에 이경설(李敬卨)의 서숙에서 수학하였고, 13세에 소학과 사서, 시경을 익혔다. 1836년(헌종 2) 20세에 포천 현감인 성근수(成近壽)의 독려로 현학에서 사서를 회강하였다. 22세에 양주 효계리로 이사하였다.

24세 때 대학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찾아가 학문을 배웠고, 3월에는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에게 배웠는데, 이항로의 이주기객론(理主氣客論)과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하였다. 26세에 증광시에 응시하였고, 27세 때 잠호(潛湖)로 이사하였으며, 성재(省齋) 유중교를 가르쳤다.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김평묵은 28세에 울업(鬱業)으로 이사했다가 30세에 포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임장 서원(臨漳書院)에서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강하였다. 1851년(철종 2) 『이정전서분류집의(二程全書分類集疑)』를 완성하였다. 1852년 7월 홍직필이 죽은 후 다시 이항로의 학설을 따라 심즉리(心卽理)의 설을 따랐는데, 특히 이항로가 본심(本心)을 이(理)라고 하는 데 대해 예지(睿智)를 이(理)라고 하였다. 유중교는 심(心)은 기(氣)라는 입장을 취해 명덕(明德)을 이로 보아 서로 견해가 달랐다.

김평묵은 1852년(철종 3) 춘천의 신천(新川)으로 이사하여 강회를 열었고, 1859년(철종 9) 가평으로 이사하였다. 1864년(고종 1) 유중교와 함께 『송원화동합편강목(宋元華東合編綱目)』을 편수하였고, 1866년(고종 3) 조정에서 이항로를 동부승지에 임명하자, 유중교(柳重敎)와 함께 스승을 모시고 상경하였으나 프랑스 군대가 물러나자 다시 귀향하였다.

1876년(고종 13) 1월에는 일본과 조약 체결을 반대하기 위해 홍재구·윤정구(尹貞求)·유인석 등의 청으로 척화 상소의 초고를 지었다. 60세 되던 1878년(고종 15) 5월 경기 어사가 학행으로 천거하여 다음 해 선공감 가감역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김평묵은 1881년(고종 18) 2월 김홍집(金弘集)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유포한 것을 비판하고 이만손(李晩孫)을 비롯한 1만여 명의 영남 유생들이 올린 위정척사 상소문을 보고 감탄하여 이를 후원하였다. 경기 유생을 위해 상소문을 짓고, 홍재학(洪在鶴) 등이 올리는 상소의 끝에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으며, 8월 척양(斥洋)·척왜(斥倭) 상소로 전라도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 1882년(고종 19)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9월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청나라에 잡혀 가자 다시 지도로 유배되었다. 1884년(고종 21) 임오군란으로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자 풀려났다. 1891년(고종 28) 12월 20일 운담 정사(雲潭精舍)에서 죽었다.

[학문과 저술]

저서에 『중암선생문집』·『중암고(重菴稿)』·『근사록부주(近思錄附註)』·『학통고(學統考)』·『천군편(天君編)』·『치도사의(治道私議)』·『해상필어(海上筆語)』·『경장문답(更張問答)』·『붕사잡록(鵬舍雜錄)』·『해상록(海上錄)』·『삼강문답(三江問答)』·『구곡문답(龜谷問答)』·『벽산심설연원(壁山心說淵源)』·『척양대의(斥洋大義)』·『남정기문(南征記聞)』·『우촌수담(雨村手談)』·『노강수록(鷺江隨錄)』 등이 있다.

[묘소]

묘는 백운산 다목동 어사곡(御師谷)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00년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었다. 문의(文懿)라는 시호를 받았다. 미원 서원(迷源書院) 및 보산 서원(寶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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