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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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都護府 |
영어공식명칭 | Samcheokdohob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법령과 제도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조선시대 삼척 지역에 설치한 지방 행정 구역 단위.
[개설]
삼척 지역은 1413년에 삼척부에서 삼척도호부로 읍격이 강등되었다. 이에 따라 지방관도 종3품 도호부사가 임명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3년(태조 2)에 삼척이 자기의 고조인 목조(穆祖)이안사(李安社)[?~1274]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삼척군(三陟郡)에서 삼척부(三陟府)로 승격시키고 홍서대(紅犀帶)를 하사하였다. 이처럼 태조에 의한 삼척부로의 승격은 인구 수와 토지 면적 등 합리 기준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왕실과의 특별한 인연에 의해 이루어졌다.
태종대에 들어와 도제(道制)와 군현제의 정비가 본격 이루어지면서 삼척 지역의 읍격도 재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삼척 지역은 1413년(태종 13)에 삼척부에서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로 읍격이 강등되었다. 이에 따라서 지방관도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임명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관련 기록]
허목(許穆)[1595~1682]의 『척주지』를 비롯한 『삼척읍지』에는 1413년에 삼척부를 삼척도호부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 『척주선생안』에는 조선시대 삼척 도호부사를 거쳐 간 수령들의 신상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내용]
삼척도호부의 하부 행정구획으로는 리(里)와 면(面)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삼척도호부 산하에는 부내, 노곡, 장생, 미로, 북평 등 5개 리가 있었다. 그 후 1630년(인조 8)경에 당시 부사이던 이준(李埈)[1560~1635]이 매곡, 덕번, 소달, 박곡 등 4개 리를 신설하여 총 9개 리가 되었다. 그러나 숙종 연간에 리를 면으로 개칭하고 장생을 상장과 하장, 덕번을 근덕과 원덕, 북평을 도상과 도하로 각각 분리 신설함으로써 삼척도호부는 총 12개 면을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의 호수와 인구 수를 보면 15세기 전반에 삼척도호부의 호는 581호였고, 인구는 2613명이었다. 이후 호수와 인구 수는 『척주지』에 따르면 1606년(선조 39) 호적 작성 당시 호가 1141호였고, 인구는 5482명이었다. 임진왜란을 겪었음에도 170여 년 사이에 호수와 인구 수가 2배로 늘어났다.
『진주지』에 따르면 1751년(영조 27) 삼척도호부의 호는 4017호, 인구는 1만 8137명이었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759년(영조 35) 호수는 3985호에 인구 1만 8069명이었고, 『호구총수』에서 1789년(정조 13)의 호수와 인구 수는 각각 3808호 및 1만 4966명이었다. 그 후 1816년(순조 16)의 경우 『진주지』는 호수 4089호, 인구 1만 7795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관동지』에서는 1826년(순조 26)경 호수가 3857호, 인구가 1만 4777명이었다. 대체로 보아 조선 후기 삼척도호부의 호수와 인구 수는 완만하지만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변천]
삼척도호부는 조선말까지 개편 없이 지속되다가 1895년(고종 32)에 삼척군(三陟郡)으로 개편되었다.
[의의와 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