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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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都護府官衙建物址內功德碑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12-1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상수 |
현 소재지 | 삼척도호부 관아 건물터 내 공덕비군 -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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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공덕비|선정비|흥학비 |
관련 인물 | 이지온|이광도|김우현|이규헌|윤훤|이영구|강석호 |
[정의]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조선시대 삼척도호부 옛 관아[동헌]터에 있는 역대 삼척부사들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
[개설]
역대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인물 가운데 이지온·이광도·김우현·이규헌·윤훤 등 5명의 부사 선정비 및 흥학비를 비롯해 군수 이구영 선정비·강석호 선정비가 보존되어 일렬로 세워져 있다.
[위치]
삼척도호부 관아 건물터 내 공덕비군은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12-1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금석문]
1.부사 이지온 청백거사비(府使 李之馧 淸白去思碑)
-전면:부사리공지온청백거사비(府使李公之馧淸白去思碑)
-후면:단기사천이백팔십칠년갑오십일월 일이립(檀紀四千二百八十七年甲午十一月 日移立)
2.부사 이광도 영세불망비(府使 李光度 永世不忘碑)
-전면:부사리공광도영세부망비 애휼해호 혁폐도세 숭정후사무자오월 일(府使李公光度永世不忘碑 愛恤海戶 革廢島稅 崇禎後四戊子五月 日)
3.부사 김우현 흥학비(府使 金佑鉉 興學碑)
-전면:부사금공우현흥학비 중신유궁 겸보육영 숭정후사정묘사월 일(府使金公佑鉉興學碑 重新儒宮 兼補育英 崇禎后四丁卯四月 日)
4.군수 이구영 영세불망비(郡守 李龜榮 永世不忘碑)
-전면:군수리공구영영세부망비 덕중어륙봉지산 산경어일진지일 함대려수 익감황장 무술구월 일(郡守李公龜榮永世不忘碑 德重於六封之山 山輕於一進之日 咸戴黎首 益減黃腸 戊戌九月 日)
5.부사 이규헌 흥학비(府使 李奎憲 興學碑)
-전면:부사리공규헌흥학비 흥학양사 천재일시 오계묘육월 일개각(府使李公奎憲興學碑 興學養士 千載一時 五癸卯六月 日改刻)
6.영친왕궁차지 강석호 영세불망비(英親王宮次知 姜錫鎬 永世不忘碑)
-전면:영친왕궁차지당상숭록대부내시부상선강공석호영세부망비 충관배두 혜급동양 해세교정 덕의고강 임인육월 일(英親王宮次知堂上崇祿大夫內侍府尙膳姜公錫鎬永世不忘碑 忠貫北斗 惠及東洋 海稅矯正 德擬高崗 壬寅六月 日)
-전면:부사 윤공□□□□만력을사십이월□(府使 尹公□□□□ 萬曆乙巳十二月□)
[현황]
1. 부사 이지온 청백거사비(府使 李之馧 淸白去思碑)[재임기간:1655~1656년, 건립 연대:1954년 이립, 규모:높이 129.5㎝×너비 41.0㎝×두께 17~16.0㎝]
비석은 관석(冠石)과 비신(碑身)이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관석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사각형[방형(方形)]의 비신 받침에 비가 세워져 있다. 부사 이지온(李之馧)[1603~1671]은 1655년(효종 6) 2월에 부임하여 왔다. 큰 가뭄이 들어 수차로 물을 푸는 제도를 반포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1655(효종 6) 정월에 추쇄어사 정인경에 의해 계파되었다. 당시 선정비를 세웠으며, 본손(本孫)이 조선 후기까지 강릉과 삼척에 살았다.
2. 부사 이광도 영세불망비(府使 李光度 永世不忘碑)[재임기간:1826~1830년, 건립 연대:1828년, 규모:높이 128.0㎝×너비 41.5~41.0㎝×두께 18.5~17.0㎝]
비석은 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관석에는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사각형의 비신 받침에 비가 세워져 있다. 부사 이광도(李廣度)는 1826(순조 26) 7월에 임명되어 8월에 왔다. 학문을 흥기시키고 농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각 면에 권학훈장과 권농도감을 두었다. 이에 농업과 학문이 크게 번성하였으니 그의 상명하고 정직함은 근고(近古)에 없던 바였다. 1830년(순조 30) 6월에 광주목사로 옮겨갔는데[규장각 자료에는 7월에 능주목사로 옮겼다고 함] 선정비를 세웠다.
3. 부사 김우현 흥학비(府使 金佑鉉 興學碑)[재임기간:1863~1865년, 건립 연대:1867년, 규모:높이 128.0㎝×너비 39.0~37.5㎝×두께 10.8㎝]
비석은 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관석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사각형의 비신 받침에 비가 세워져 있다. 부사 김우현(金佑鉉)은 1863년(철종 14) 2월에 왔다가 1865년(고종 2) 7월에 나주목사로 옮겨 갔다.
4. 군수 이구영 영세불망비(郡守 李龜榮 永世不忘碑)[재임기간:1896~1900년, 건립 연대:1898년, 규모:높이 119.5㎝×너비 39.0㎝~36.0×두께 11.0㎝]
비석은 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져 있다. 관석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사각형의 비신 받침에 비가 세워져 있다. 군수 이구영(李龜榮)은 1896년 7월 26일에 왔다가 1900년(광무 4년) 11월에 갈리어 갔다. 처음 부임할 때 교군 4명과 복마 1필만 거느리고 왔다. 경병장 성문규가 울진·평해 2읍을 거쳐와 읍내에 머물면서 의병장과 서기 두 사람을 잡아간 뒤 잘못된 증거로 신문하여 거의 죽음에 이르자 석방하여 보냈다. 전쟁이 끝난 후 부사가 봉록의 일부를 떼어내 역군들을 불러모아서는 각 면에서 날마다 역사를 많이 벌였는데 돌을 지고 날라 성을 쌓아서 수해를 막았으니 읍민들이 비석을 세워 그 공덕을 칭송하였다. 여기에 덧붙여 객사, 죽서루, 작청, 호적고 등도 새롭게 수리하였다. 이러한 군수의 명성은 후대에 영원히 남기 때문에 떠난 후에라도 반드시 비석을 세우려고 할 것이다라고 당시 사람들이 말하였다.
5. 부사 이규헌 흥학비(府使 李奎憲 興學碑)[재임기간:1835~1839년, 건립 연대:1903년 개각, 규모:높이 97.0㎝×너비 34.0~32.7㎝×두께 9.0㎝]
비석은 뚜껑돌[개석(蓋石)] 없이 비신만 있다. 비의 윗부분은 둥글게 처리한 원수형(圓首形)이고, 사각형의 비신 받침에 세워져 있다. 부사 이규헌(李奎憲)은 1835~1839년(헌종 원년~5)에 삼척부사로 재직하였다. 1836년 병신년과 1837년의 큰 흉년에 유민(流民)을 구활(救活)하였다. 이규헌은 봉록(俸祿)을 덜어내고 부민(富民)들에게서 많은 돈을 마련하여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또 백성들의 세 부담을 줄여 주고 요역 감면을 위해 노력하였다. 양사보(養士保)도 창설하여 거접(居接)의 자금을 활용하여 유학 교육을 장려하였다. 만년제(萬年堤)를 쌓았으며, 봉황대에 석인상 3개를 세워 상충하는 기운을 다스렸다. 죽서루 아래에는 방수제(防水堤)를 쌓았다. 빙월루(氷月樓), 원풍루(願豊樓),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戲之所) 등 3개의 현판을 써서 새기고는 세 누각에 각각 걸었다. 운흥사(雲興寺)에 화재가 나자 중건할 수 있도록 쌀과 돈을 지원하여 중건한 후 사명(寺名)을 신흥사(新興寺)로 하였으며, 흑악사·공양왕릉·효자 및 열녀 비각을 수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1839년 12월에 능주목사로 옮겨갔다. 이에 앞서 1838년에 그를 기리기 위해 역둔에는 선정비를 세웠다. 부내에는 흥학비가 전해지고 있다. 부사 이규헌과 관련하여 강원도문화재자료 제121호인 ‘부사이규헌휼민청덕영세불망비(府使李奎憲恤民淸德永世不忘碑)’가 하장면 역둔리에 있는 금옥각(金玉閣) 안에 ‘금옥첨원비(金玉僉員碑)’와 함께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철비(鐵碑)로, 이규헌이 1837년의 천재지변으로 기근이 막심함으로써 조정에 건의하여 곡식을 내어 백성들을 구휼하니 역둔리와 인근 주민들이 감사의 표시로 세운 것이다.
6. 영친왕궁차지 강석호 영세불망비(英親王宮次知 姜錫鎬 永世不忘碑)[생몰년 미상, 건립 연대:1962년, 규모:높이 128.0㎝×너비 52.0~48.5㎝×두께 12.3~11.0㎝]
비석은 뚜껑돌 없이 비신만 있다. 비의 윗부분은 둥글게 처리한 원수형이고, 사각형의 비신 받침에 세워져 있다. 강석호(姜錫鎬)는 고종의 신임이 두터웠고, 1896년(건양 1) 친러파 이범진(李範晉)[1852~1910]과 러시아 공사관 통역 김홍륙(金鴻陸)[?~1898] 등의 사주를 받아 아관파천 때 비밀연락 임무를 맡았다.
7. 부사 윤□□□□(府使 尹□□□□)[재임기간:1604~1605년, 건립 연대:1605년, 규모:높이 96.0㎝×너비 46.5㎝×두께 13.0㎝]
비석은 관석과 비신이 하나의 석재로 만들어졌고, 관석에는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비석이 파손되어 중간 이하 부분이 없어졌지만 사각형의 비신 받침에 남아 있는 비석을 세웠다. ‘만력을사십이월(萬曆乙巳十二月)’과 ‘부사윤공(府使尹公)’이라는 비문 글자를 볼 때 부사 윤훤(尹暄)에 대한 선정비로 추정된다. 부사 윤훤은 1604년(선조 37) 7월에 와서(6월 2일 임명) 유생들 교육에 힘썼으며, 1605년(선조 38) 10월 통정대부로 승진하여 동래부사로 옮겨갔다.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 비를 세웠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 비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삼척도호부 관아 옛 동헌터에 있는 공덕비군은 삼척부사와 군수의 재임 당시 선정을 베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역대 삼척부사와 군수의 선정 행적을 일부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