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1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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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大耳里- |
영어공식명칭 | Samcheoksi Daeiri Watermill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
집필자 | 김도현 |
[정의]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에 있는 통방아.
[개설]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는 덕항산에서 흐르는 물이 풍부한 곳으로 100여 년 전부터 통방아, 물레방아 등의 방아가 전해왔다. 물레방아는 신동초등학교 대이분교 뒤편에 있었으나 오래 전에 사라졌다고 한다. 마을 공동소유의 통방아 4개는 마을주민이 공동으로 사용하다가 외지로 팔려나갔다. 1940년 경 제작된 개인 통방아이며, 1989년 3월 10일 중요민속자료 제22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통방아는 곡식을 도정하는 작업인 찧기와 가루내는 작업인 빻기에 이용되었다. 통방아는 가을에 주로 많이 사용하였으며, 도정한 주요 곡물은 귀리, 청보리, 피, 메밀, 콩, 조, 수수, 옥수수 등이었다. 애초 개인용으로 설치된, 중요민속자료 제222호 삼척 대이리 통방아의 경우 소형이라서 하루 종일 보리를 찧으면 3말 정도 찧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공이가 오르내리는 속도는 3분에 7회 정도로 매우 느리므로 사람이 곁에 있을 필요가 없다.
1970년대 이후 정미소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편리성이나 작업의 효율성으로 인해 점차 통방아를 비롯한 각종 방아의 사용은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통방아는 작업 효율면에서는 기계방아를 따르지 못했으나 도정한 곡식의 품질만큼은 기계방아를 능가하였다고 한다.
[건립 경위]
대이리에 통방아가 널리 설치된 배경은, 깊은 산간지역이라 수원이 풍부하고 방아재목이 될만한 나무를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너와, 굴피, 겨릅, 수숫대 등이 많아 방앗간 만들기나 지붕이기도 수월하였다는 데 있는 것 같다. 게다가 통방아는 무인 도정도구의 역할도 하였으므로, 산간지역에 분산된 농토를 경작하던 농민들에게 효과적이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통방아는 1992년까지 사용되었다. 이 통방아는 1940년대 후반에 이주성씨가 자기 땅에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만든 개인용 통방아였다. 처음 이 통방아를 만들 때는 비록 개인용이었지만, 제작할 때 주민들이 도와주었다고 한다. 중요민속자료 지정 당시의 소유자는 이상구씨였으나 그마저 최근에 사망하자, 현재의 소유자는 그의 아들 이형길씨[이주성의 증손자]이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통방아는 2002년도에 홍수로 말미암아 방앗간의 몇몇 서까래만 남고, 방아와 굴피지붕은 유실되어 버렸다. 유실된 통방아의 몸체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호박[확]’을 찾아서 복원할 때 사용하였다. 2003년도에 옛 통방아의 형태대로 복원하였다고 하나, 미진한 부분도 있다.
[위치]
삼척 대이리 통방아 는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 산105에 위치한다.
[형태]
통방아의 방아채는 크게 방아머리, 방아허리, 수통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방아채만으로는 방아를 찧을 수 없으며, 부대장치나 시설이 필요하다. 방아머리에는 공이를 박아야 하고, 방아의 기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시소의 원리가 잘 적용될 수 있도록 쌀개를 설치해야 한다. 통방아는 그 무게나 크기가 대단히 커서 중심축에 해당하는 ‘쌀개’를 설치하기 위해서는 ‘챗나무’를 쌀개 아래에 받치고 챗나무를 받쳐주는 ‘관재판’을 다시 방아허리 부분 아래에 설치한다.
복원된 대이리 통방아는 전체 길이[방아머리~수통 끝]가 492㎝이고, 방아머리의 지름이 46㎝이며, 방아의 다리에 해당하는 수통 부분의 재목은 지름이 60㎝ 정도이며, 방아의 축에 해당하는 쌀개의 길이는 175㎝, 쌀개를 받치고 있는 2개의 챗나무 길이는 378㎝, 2개의 챗나무를 받치고 있는 머릿나무의 길이는 373㎝이다. 그리고 수통의 길이는 142㎝, 폭은 31㎝, 깊이는 34㎝로서, 용량은 대략 90ℓ정도가 된다. 원뿔형 방앗간의 내부 천정 높이는 340㎝, 기둥형 서까래는 370㎝ 내외이고 그 굵기는 14㎝ 정도이다. 그리고 방앗간 출입문의 크기는 가로 109㎝, 세로 119㎝이다. 곡식을 담는‘호박’[확]의 최대 직경은 33㎝이다. 호박의 규모에 비추어 볼 때 방아의 규모를 비교적 크게 만든 것으로 여겨진다.
통방아를 만들 수 있는 재목은 대략 소나무 수령이 200년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크기의 재목을 구하기 어려운 준산간 지역에서는 수통을 나무 자체에 파서 만들기보다는 판재를 이어 붙여 만드는 경우가 많다. 통방아의 경우 방아를 찧을 때마다 방아 몸체에 충격이 심하므로, 수통을 판재로 이어 만들면 수명이 짧아진다.
통방아는 물레[수차]를 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낙차가 물레방아보다 크지 않아도 가능하다. 물레방아가 물의 낙차를 물레의 회전력으로 바꾸고, 다시 그 회전력을 이용해 방아를 찧는다고 한다면, 통방아는 시소의 원리에 의해 물의 무게 즉, 중력을 이용해 방아머리를 들어올렸다가 수통의 물이 쏟아지고 나면 방아머리가 떨어져서 방아를 찧게 된다. 이처럼 통방아는 작동원리가 간편하여 마땅한 재목만 있다면 물레방아에 비해 제작이 쉽다.
통방아의 방아머리 부분은 원뿔형 움집 속으로 넣어서 도정작업을 할 때 눈·비를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움집이 곧 방앗간인 셈인데, 복원된 것을 기준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기둥형 서까래 18개를 암반과 바위 위에 원뿔형으로 세워 다래줄로 얽어 묶어서 지붕의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겨릅[요즘에는 수숫대]으로 지붕을 덮고 다시 굴피를 씌우고, 이를 고정하기 위하여 외부에 다시 기둥형 서까래를 10개 눌러서 물푸레나무로 얽어 묶었다. 원래 방아채와 출입문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지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최고 1m 높이의 돌담을 쌓고 그 위에 서까래를 세웠다고 한다. 그 이유는 서까래가 잘 썩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천정 높이를 높여 실내 작업공간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복원된 통방아는 이와 다소 다르게 되어 있다.
한편 마을 공용 통방아간의 경우에는 야간이나 동절기 작업에 대비하기 위하여 실내에 조명시설이나 난방시설을 부엌 아궁이처럼 마련하여 두었다고 한다. 조명시설은 아궁이처럼 만들되, 위에는 돌로 덮고, 연통을 바깥으로 낸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통방아간에는 애초부터 조명 겸 난방시설이 없었다.
[현황]
현재 삼척 대이리 통방아와 도수로는 기계 방아의 보급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으며, 통방아의 원리를 교육하기 위한 교육 자료로 복원되어 관광 자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삼척 대이리 통방아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주목된다.
먼저 동력원으로 소규모의 개울이나 계곡수를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통방아를 설치하기 위한 수량과 물의 낙차 조건이 까다롭지 않아 물레방아를 설치하기 어려운 곳에서도 통방아를 설치할 수 있었다. 제작기술적인 측면에서도 통방아는 시소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기 때문에 물레방아보다는 제작이 한결 쉬웠다. 다만 방아의 크기가 도정 능력을 가늠하는 것이므로, 충분한 크기의 방아재목을 구할 수 있는 지역에서 제작과 관리가 쉬웠던 것이다. 그리고 통방아는 무인도정기구라는 점에서, 인구밀도가 낮고 농토가 분산된 산간지역에서 매우 효율적인 것이 었다. 왜냐하면 멀리 일을 나가면서 도정할 곡식을 방아 ‘호박’에다 부어놓고 방아를 작동시켜 두었다가 나중에 돌아와서 재작업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방아는 산간 농촌의 문화적 특성을 잘 드러내는 유형문화재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통방아는 수자원을 간편하고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시설이라는 점에서 수자원의 이용과 관련한 교육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특히 물과 관련한 환경문제, 그리고 대체 에너지 문제와 관련짓는다면 통방아의 유용성은 눈여겨 볼 만하다. 이러한 점에서 삼척 대이리 통방아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보호할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