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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라리 가마터[불당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429
한자 靑羅里-[佛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백영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고려 후기~조선 전기 -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사용된 나발터 토기 가마, 양진터 분청사기 가마, 양진터 청자 가마 등의 가마터가 분포됨
소재지 청라리 가마터[불당골] -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 일대지도보기
성격 가마터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에 있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가마터.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 일대에는 나발터 토기 가마, 양진터 분청사기 가마, 양진터 청자 가마 등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걸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마터가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청라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현황]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6.5㎞쯤 가면 청라리 나발터 마을이 있다. 나발터 토기 가마터는 이 마을의 북동쪽에 있는 표고 200m 내외의 남향사면 구릉 중단부에 있다. 현재 가마터가 있는 곳은 묘를 쓰기 위하여 산사면을 평평하게 깎아서 평탄하게 정지된 상태이다. 이 과정에서 가마의 원형이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민묘를 조성하기 위하여 산사면을 절토하는 과정에서 가마가 노출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토기가마 주변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 과정에서 회청색조의 경질토기 조각과 소토 조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1~2기의 가마가 능선 방향을 따라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수습된 유물은 무문의 회청색 경질토기 조각이 대부분이며, 부분적으로 격자타날을 한 것도 있다. 수습된 유물의 조악한 성형기법과 형태로 보아 조선 후기에 민간용의 조질토기를 공급하던 가마로 판단된다.

연서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5㎞ 정도 가면 청라리 마을 양진터 입구가 나온다. 양진터 분청사기 가마는 두 곳이다. ‘양진터 분청사기가마터①’는 청라리 마을의 양진터와 나발터 사이의 개간된 경작지에 해당하고, ‘양진터 분청사기가마터②’는 마을의 ‘연기향토박물관’ 뒷편에 위치한다. 두 곳 모두 오랫 동안 민가 개축과 경작지 개간이 반복된 탓에 지형이 심하게 훼손되어 구체적인 가마의 형태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전체적으로 많은 양의 분청사기 조각과 소토 조각이 경작지에 산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경작지와 그 주변 어딘가에 가마가 자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이 산포되어 있는 범위로 미루어 볼 때 가마는 2~3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습되는 유물은 분청사기 조각으로 상감분청과 인화분청이 주를 이루며, 기종은 대접 및 접시류이다. 주로 사용된 문양은 내저면의 중앙에 단독 국화문을 시문하였다. 그러나 파손이 심하여 전체적인 문양 시문 양상이나 기형은 알 수 없다. 굽의 저부에서는 모래받침 흔적이 있으며, 내저에서는 네 곳의 내화토받침을 한 흔적이 확인된다. 이밖에도 가마 내에 분청사기를 받치는 데 사용된 도침과 가마벽 파괴 시 노출된 것으로 보이는 소토 조각도 상당량이 발견되었다.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소재지에서 604번 지방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약 5.5㎞ 거리에 청라리 양진터 마을이 있다. 양진터 청자 가마는 청자 가마터로, 추정되는 지역은 양진터 마을과 나발터 마을 사이의 개간된 경작지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양진터 분청사기가마터①와 비교적 가까운 7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현재 남서향한 산사면의 일부를 개간하여 복숭아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경작지 외곽으로는 농장으로 진입하는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 임도 개설을 위하여 능선을 절개하는 과정에서 상당량의 자기 조각과 소토 덩어리 등이 노출되었다는 현지 주민의 전언으로 미루어 볼 때 가마의 원형은 완전히 파괴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경작지와 임도변에 많은 양의 소토 조각과 자기 조각 등이 노출되어 있다. 전체적인 유물 산포 범위와 지형 구조로 보아 1~2기의 가마가 자연경사면을 따라 입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물의 경우 대부분 청자 조각이다. 대접, 접시, 병이 주요 기종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상감 분청사기 조각 등도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청자대접과 접시 조각은 내저원각이 깊게 파였으며, 동체부는 사선을 이루어 올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표면에는 청녹색조의 유약이 내저면 전체에 시유되어 있으며, 외면은 굽 주위까지만 거칠게 시유[도자기를 빚을 때 잿물을 바르는 일]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청라리 일대의 가마터에서 수습된 유물들은 전체적인 제작 수법이 세련되지 않고 일부 분청사기 조각 등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가마터들은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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