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4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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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增東國輿地勝覽 |
분야 | 지리/인문 지리,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경순 |
[정의]
1530년 조선 전기의 문신 이행, 윤은보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증수하여 편찬한 관찬지리서.
[형태/서지]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찬지리서로, 55권 25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세 차례의 수교(讐校)[글이나 책을 다른 것과 비교하여 교정함]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원래 『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성종 12)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東國文士)의 시문을 첨가하였으며, 체재(體裁)[형식]는 남송(南宋) 축목(祝穆)의 『방여승람(方輿勝覽)』과 명나라의 대표적 통지인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참고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초판 1481] 권1의 권두이다. 조선에 대한 2,000쪽에 달하는 광범위하고 상세한 본문에 딸려 있는 이 지도는 본문에 상세한 내용을 수록하는 대신 지도는 단순화하는 데 집중하였다.
[구성/내용]
각 도의 연혁과 총론·관원을 적은 후 목·부·군·현의 연혁, 관원·군명·성씨·풍속·형승(形勝)[뛰어난 지세나 풍경]·산천·토산성곽·관방(關防)·봉수·누정·학교·역원·교량위치·불우·사묘·능묘·고적·명환(名宦)[중요한 자리에 있는 벼슬 또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벼슬아치]·인물·시인의 제영(題詠) 등 순서로 기재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이후에 증보된 것은 신증(新增)으로 밝혀져 있다. 인물 속에는 효자·열녀가 포함되어 있다.
경도 앞에 조선 전도인 팔도 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먼 지극히 단순한 형태의 도별 지도가 삽입되었다. 이 지도는 동서의 폭이 넓은 반면에 남북의 길이가 짧아 한반도 모양이 기형적이며, 주요 하천의 유로가 부정확하고, 강폭이 과장되어 있는 등 문제점이 많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통계 대부분이 전국의 모든 고을에 일정한 규식(規式)[정하여진 법규와 격식]을 내려 조사한 것에 토대를 두어서 당시의 인문지리적 내용과 실제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토산 항목이 중앙에 보관되어 있던 공안(貢案)[조선 시대에 공물(貢物)의 품목과 수량을 기록하던 문부(文簿)]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였고, 지도에 표시된 내용도 산과 하천이 중심이 되어 있어 산천에 대한 제사와 관련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에 충청도를 설명하는 본문 내용에는 54개 고을과 각각의 고을을 보호하는 진산(鎭山)[도읍지나 각 고을에서 도읍지, 고을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으로 정하여 제사하던 산]의 이름이 실려 있다. 이 진산에서 수령들이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다. 종교적인 요소가 지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의현은 현재의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전동면·소정면 일부를 포함하는 작은 고을이었고, 조선 후기에 읍치[조선 시대에 군무(軍務)를 맡아 보는 관아가 있던 고을]는 전의면 읍내리 일대에 있었다.
전의현의 건치 연혁이나 군명 항목에는 성과 관련된 고을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고적 항목에는 이성(李城), 고산산성(高山山城), 금이성(金伊城), 증산산성(甑山山城) 등 4개나 언급되어 있어 어느 성이 조선 초기 전의의 치소성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읍치 남쪽 7리의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있다는 이성(李城)은 전동면 신방리의 이산(李山)[220m] 정상을 둘러싼 둘레 약 510m의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세주(細註)[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주석(註釋)]에는 후삼국시대의 인물이자 전의이씨의 시조로 알려진 이도(李棹)가 살던 곳이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향교의 안산으로, 높지는 않지만 전의현의 주요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읍치 동쪽 8리에 있다는 고산산성은 둘레가 5,132척이라고 나온다. 고산산성은 전동면 청송리의 운주산(雲住山)[459.7m] 정상을 둘러싼 3,210m의 테뫼식 석축 운주산성이다. 성 안에는 둘레가 1,230m인 토축 산성이 있는 이중성이라고 한다. 고을의 동북쪽에 치우쳐져 있지만 산성의 위치가 높아서 고을의 주요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읍치 남쪽 7리의 운주산에 있다고 하는 금이성(金伊城)은 금성산(金城山)[424m] 정상을 둘러싼 둘레 약 500m의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고을의 남쪽에 치우쳐져 있지만 산성의 위치가 높아서 고을의 주요 지역이 한눈에 조망된다.
읍치의 서북쪽 4리에 있다는 증산산성은 증산(甑山)[248m] 정상을 둘러싼 둘레가 약 420m인 테뫼식 산성이다. 고을의 서북쪽에 있지만 주요 지역이 한눈에 조망된다.
네 개의 산성 중 이성은 높이가 생활면(生活面)[생활 상태]으로부터 높지 않고 전의이씨 이도가 살던 곳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과 고을의 거의 한가운데에 있는 점 등이 기록에 나타나는 ‘유수기장시’의 성하장시(城下場市)를 거느린 치소성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강조된 내용은 연혁, 성씨, 산천, 역원, 고적, 인물 등이다. 연혁에서는 시대에 따른 각 군현의 지명 변화, 행정구역의 변천 과정 등을 밝히고 있다. 성씨는 토성(土姓)·내성(來姓)·속성(續姓) 등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으며, 역사상 유명한 학자·고승·충신·무장·효자·열녀 등을 다룬 인물조와 관계가 깊다.
산천조는 명산, 하천, 바다, 호소(湖沼)[호수와 늪], 나루터 등의 위치를 읍 기준으로 거리와 방향을 기록하였다. 역원제와 봉수제는 왕명의 전달, 긴급 군사 정보의 송부, 공무 여행자와 관물 수송 등 봉건 전제군주제 하에서 행정상의 중추신경 구실을 한 만큼 매우 중요시되었다.
봉수와 역원 위치는 읍 중심으로 방위와 거리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역은 찰방역과 일반역으로 나누었다. 찰방역의 경우 찰방역 소속 역명을 열거하였으며, 주요 역원은 역원의 시설과 연혁 등이 기술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集成編)으로, 속에 실린 지도와 함께 조선 후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지리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지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역사, 행정, 군사, 사회, 민속, 예술, 인물 등 지방 사회의 모든 방면에 걸친 종합적 성격을 띤 백과전서식 서적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 사회의 여러 측면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로, 여러 학문 분야에서도 중요한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