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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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錦南南山影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남산길 51-4[성강리 193-4]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홍제연 |
건립 시기/일시 | 1906년 - 금남 남산영당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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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1984년 5월 17일 - 금남 남산영당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2년 7월 1일 - 금남 남산영당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 지정 해지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2년 12월 31일 - 금남 남산영당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7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금남 남산영당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재지정 |
현 소재지 | 금남 남산영당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남산길 51-4[성강리 193-4] |
원소재지 | 금남 남산영당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성강리 201-1 |
성격 | 건물 |
양식 | 맞배지붕 건물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소유자 | 박창규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성강리에 있는 남이웅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사당.
[개설]
금남 남산영당은 남이웅(南以雄)[1575~1648]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으로, 1906년 공주 유림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남이웅의 영정은 모두 4점이며, 이 가운데 2점은 초본이다. 초본 2점 중 하나는 1627년 명나라 사행(使行)[사신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는 일] 시 중국 화가 태방정이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이웅이 좌의정 재임 시 그린 초상화를 참고하여 1706년에 다시 그린 것이다.
집에서 영정을 모시고 제향(祭享)[제사]을 지내던 것을 1906년 유림들이 힘을 모아 영당을 세우고 제향을 이어 가게 되었다.
[위치]
금남 남산영당은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성강리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봉곡리의 경계에 있는 남산소 마을에 자리한다.
남산소 마을에는 남이웅과 부인 남평조씨(南平曺氏) 조애중(曹愛重)[1574~1645]의 합장묘가 있다.
남이웅이 충청도 관찰사로 재직 중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도 하며, 이 일대가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려 준 논밭]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문중에서 전해지는 조선시대 호구단자(戶口單子)[조선 시대에 호주가 가족 사항을 적어 지방 수령에게 신고하던 서류]를 살펴보면 남산소에 의령남씨가 거주하게 된 것은 1762년 무렵인 것으로 추정된다.
[변천]
현재의 영당 건물은 1906년 건립 이후 수차례 중수(重修)[건축물 등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침]되었다.
[형태]
금남 남산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삼문과 담장이 설치되어 있다.
[현황]
금남 남산영당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로 지정되었다가 성강리 일대가 세종특별자치시로 편입됨에 따라 2012년 12월 31일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로 다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남산영당 내에는 남이웅의 영정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 『시북노정기(市北路程記)』와 『남평조씨 병자일기(南平曹氏丙子日記)』가 주목된다.
이 외에도 남이웅이 1647년 병을 이유로 올린 사직 상소에 인조가 하답한 문서 12건이 보존되어 있다.
남이웅이 좌의정으로 승진한 교지와 진무공신교서(振武功臣敎書)도 남아 있다.
후손들이 영당을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어 문화재가 잘 전승·보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