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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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屛山祠 |
영어공식명칭 | Byeongsansa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351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안경희 |
건립 시기/일시 | 1972년 - 병산사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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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1년 05월 31일 - 병산사 연기군 향토유적 제36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병산사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6호 지정 |
문화재 해지 일시 | 2014년 07월 01일 - 병산사 연기군 향토유적 제36호 지정 해지 |
현 소재지 | 병산사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352 |
원소재지 | 병산사 - 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달전리 352 |
성격 | 건물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세종특별자치시 |
관리자 | 세종특별자치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6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에 있는 성기운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
[개설]
병산사는 금남면 달전리 출신의 일제강점기 항일의사 성기운(成璣運)[1877~1956]의 영정(影幀)[제사나 장례를 지낼 때 위패 대신 쓰는, 사람의 얼굴을 그린 족자]을 봉안(奉安)[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을 받들어 모심]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1972년 성기운의 학문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문인 성구용과 고을 유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성기운은 항일의사로 면암 최익현과 지산 김복한을 찾아 인연을 맺은 후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후 일제의 호적령과 조세, 부역 등 각종 정책에 반대하다가 1912년 구속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다.
일제의 식민정책에 완강히 반대한 항일의사였으며, 많은 후학을 길러낸 학자였다.
[위치]
병산사는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달전리 낮은 구릉 중단부에 동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병산사가 있는 달전리 원달전 마을은 원래 창녕성씨 집성촌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주민의 90% 이상이 창녕성씨였다. 사육신 성삼문(成三問)을 배향하는 문절사(文節祠) 등 관련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변천]
1972년 성기운의 제자들과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형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에는 사당 건물인 병산사와 외삼문인 숭의문이 있다.
사우(祠宇)[사당] 동쪽에 병산사묘정비(屛山祠廟庭碑)가 있다. 담장 밖으로 비석이 세워져 있다.
[현황]
병산사는 2001년 연기군 향토유적 제36호로 지정되었다가 2012년 7월 1일 출범한 세종특별자치시에 편입됨에 따라 해지되고 2014년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36호로 지정되었다.
병산사에는 성기운의 문집과 목판 250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7일 성기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낸다.
[의의와 평가]
병산사는 문절사와 함께 달전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세거하여 온 창녕성씨 집안의 사족(士族)[문벌이 좋은 집안] 활동을 보여 주는 유적이다.
성삼문으로 시작된 절의와 기개가 일제강점기 성기운에게까지 이어져 내려 온 창녕성씨 집안의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