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09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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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安林氏雙孝旌閭 |
이칭/별칭 | 효자 임자의·임태선 쌍정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산21-1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순영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부안임씨 쌍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2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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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부안임씨 쌍효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산21-16 |
원소재지 | 효자 임자의·임태선 쌍정려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원2리 머래마을 |
성격 | 정려 |
양식 |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부안임씨 문중 |
관리자 | 부안임씨 문중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2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에 있는 부안임씨 2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부안임씨 쌍효 정려는 효자 임자의(林自儀)[1672~1717]와 임태선(林太先)[1675~1720] 형제의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임자의·임태선 형제는 임난수(林蘭秀)의 후손으로 본관이 부안이고, 아버지는 임상담(林尙談)이다. 동생 임태선의 본명은 태의(太儀)이다. 태선은 어렸을 때의 이름으로, 정려를 청하는 계를 올릴 때 ‘태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정려도 ‘태선’으로 내려졌다.
임자의·임태선 형제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서 어머니 경주최씨 슬하에서 자랐다. 어린 나이에도 효성이 지극하였고, 형제간 우애도 깊었다.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형제는 서로 번갈아 가며 병간호를 하였다. 어머니의 똥을 맛보며 차도를 살피는 등 병간호에 애를 썼으나 결국 어머니가 병사하자 으로 연명하면서 3년간 묘 아래에 초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2리 마을회관에서 운주산성 방향으로 올라가면 부안임씨 진사공파 종중묘역이 나오는데, 부안임씨 쌍효 정려는 진사공파 종중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다.
[변천]
임헌회(任憲晦)가 1875년(고종 12)에 지은 ‘林孝子兄弟旌閭記’에 의하면 임자의·임태선 형제는 각각 1717년(숙종 43)과 1720년(숙종 46)에 죽었다. 1752년(영조 28)에 고을의 선비들이 형제의 효행 사실을 수령에게 호소하자 수령이 감영에 보고하였으며, 감영에서 조정에 아뢰어 조정으로부터 명정(銘旌)[충·효·열을 행한 사람에게 나라에서 주는 최고의 포상]을 받았다고 한다.
1933년 정려를 중건할 때 만든 ‘林孝子兄弟旌閭重建記’에 의하면 1910년(융희 4) 임자의·임태선 형제가 모두 통정대부 정3품 비서감승에 증직되었으며, 명정 시기도 ‘영조대왕 29년 임신 8월’이라고 적혀 있어 정려기의 내용과 차이를 보인다. 1752년에 정표(旌表)[착한 행실을 세상에 드러내어 널리 알림]를 청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15년이 지나 명정을 받았거나 먼저 명정을 받았다가 나중에 추가로 증직을 받은 것으로 추측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부안임씨 쌍효 정려 앞 안내판에는 ‘선조께서 通政大夫 秘書를 贈職하고 命旌으로 旌門을 건립하였다’고 적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임자의와 임태선의 태어난 해는 각각 1672년(현종 13)과 1675년(숙종 원년)]. 정려가 세워진 후 몇 차례 중수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부안임씨 쌍효 정려는 원래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원리 머래마을에 있었다가 세종특별자치시 건설 계획에 따라 현재의 부안임씨 진사공파 종중묘역이 있는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미곡리 운주산으로 이전하였다.
[형태]
부안임씨 쌍효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건물로,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다. 시멘트를 깔아 주변의 바닥을 다듬었으며, 화강석재를 가공한 8각의 높은 주초석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나무기둥을 올렸다. 4면은 홍살을 돌렸으며, 아래쪽은 시멘트로 막아 놓았다. 익공이 두 개인 가구 양식이다. 정면 상단부에는 ‘雙孝子旌閣’이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다. 최근에 새롭게 정비하였다.
[현황]
부안임씨 쌍효 정려 내부 중앙 상단에 붉게 칠한 명정현판을 걸어 놓았고, 후면 상단에는 정려기가 걸려 있다. 가로 188㎝, 세로 46㎝ 크기의 명정현판에는 ‘孝子 贈通政大夫正三品秘書監丞林自儀 贈通政大夫正三品秘書監丞林太先 兄弟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부안임씨 쌍효 정려 내부 후면에 걸려 있는 ‘林孝子兄弟旌閭記’는 1875년(고종 12)에 임헌회가 지은 것이다. 크기는 가로 154㎝, 세로 38㎝이다. 부안임씨 쌍효 정려 후면에는 ‘扶安林氏 형제의 旌門을 세운 事蹟’이라는 내용의 문서가 액자 형태로 걸려 있고, 바로 위에는 1933년 정려를 중건할 때 만든 ‘林孝子兄弟旌閭重建記’가 있다. 전 장릉참봉(莊陵參奉) 임감재(任坎宰)가 글을 짓고, 7대손 헌욱(憲郁)이 글을 썼다. 부안임씨 쌍효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임자의·임태선 형제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형제간 우애 속에 홀로된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여 타의 모범이 되었다. 아쉽게도 부안임씨 쌍효 정려는 유적 내의 명정현판과 정려기에 적힌 명정 연대가 서로 달라 정확한 명정 연대 판정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