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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0925
한자 孝子林秀俊旌閭
분야 역사/전통 시대,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644-194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고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 효자 임수준 정려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2014년 09월 30일연표보기 - 효자 임수준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4호 지정
현 소재지 효자 임수준 정려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644-194 지도보기
원소재지 효자 임수준 정려 -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월산리 666
성격 정려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부안임씨 문중
관리자 부안임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4호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에 있는 임수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개항기에 세운 정려.

[개설]

효자 임수준 정려부안임씨 임수준(林秀俊)[1810~1875]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904년에 명정을 받아 건립되었다. 임수준은 본관이 부안(扶安)이고 자는 사민(士民)이며, 호는 소재(素齋)이다. 1810년(순조 10) 충청도 연기군 남면 월산리에서 태어난 임수준은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나이 6세에 3년간 상복을 입고 죽으로 연명하였으며, 머리도 깎지 않았다고 한다. 임수준은 학문에도 뛰어나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임수준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 후배 양성에 전력하던 중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났으며, 때마침 극심한 가뭄이 겹쳐 난민이 발생하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쌀 100가마를 이웃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위치]

세종특별자치시에서 남청주 IC 방면으로 7.5㎞ 정도 가면 금강변에 접한 월산리 윗말이 나온다. 효자 임수준 정려는 마을 입구의 동남쪽 도로변에 북동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2019년 현재 효자 임수준 정려가 있는 마을은 세종특별자치시 주거계획 변경으로 모두 철거되어 유적만 남아 있다.

[변천]

송병선(宋秉璿)이 쓴 묘비명에 의하면 1875년(고종 12) 임수준이 사망한 후 1884년(고종 21) 유학 이봉선(李鳳善) 등이 임수준의 효행 사실을 상신하여 조정에서 통훈대부대사헌감찰(通訓大夫司憲府監察)로 증직하였다. 1904년(광무 8) 고을의 선비들이 또 한 번 장예원(掌禮院)에 청하여 정려를 받기에 이르렀다. 효자 임수준 정려 주변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으나 효자 임수준 정려 중수 사적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형태]

효자 임수준 정려는 정면과 측면 각 1칸에 맞배지붕 형식을 하고 있다. 양 측면의 박공 밑에는 방풍판이 설치되어 있다. 화강석재를 가공하여 제작한 8각의 초석 위에 둥근 나무기둥을 올리고, 사면에는 홍살을 돌렸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각 칸의 창방 위에는 2개씩의 화반대공을 올렸다. 효자 임수준 정려의 내부 중앙에 별도로 8각의 고주초석(高柱礎石)을 세우고 홍살문을 올린 후에 정면에 ‘孝子門’이라는 현판을 달아 놓았다.

[현황]

효자 임수준 정려 중앙에는 효자비를 세웠다. 비석은 화강석재의 방형대좌 위에 오석(烏石)의 비신을 올렸으며, 화강석재로 제작한 옥개형(屋蓋形) 이수(螭首)[용의 형체를 새겨 장식한 비석의 머릿돌]를 올리고 있다. 비신 전면에는 ‘孝子 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林秀俊之閭 上卽位四十一年甲辰十二月 日 命旌’이라고 음각되어 있고, 옆면과 후면의 3면에는 ‘贈監察林公旌閭記’라고 새겨진 전서(篆書) 아래에 정려기가 음각되어 있다. 송병화(宋炳華)가 비문을 지었으며, 조병집(趙秉輯)이 전서와 정려기를 쓰고 전우(田愚)가 비석 전면의 글씨를 썼다. 비석 크기는 가로 45㎝, 세로 18㎝, 높이 136㎝이다. 효자 임수준 정려는 2014년 9월 30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14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효자 임수준 정려에는 임수준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증직에 만족하지 않고 효자 임수준 정려 건립에 힘쓴 부안임씨 후손들의 꾸준한 노력이 깃들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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