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1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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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谷里-長丞祭 |
영어공식명칭 | Religious Ritual for a Jangseung of Daegokri Daesadong |
이칭/별칭 | 서낭제,대곡리 장승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민정희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09월 30일 - 대곡리 대사동 장승제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7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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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2년 - 국립민속박물관의 초청을 받아 장승 제작 시연 |
의례 장소 | 대곡리 대사동 장승제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
성격 | 동제|장승제 |
의례 시기/일시 | 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 |
신당/신체 | 목장승 2기 |
문화재 지정 번호 |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7호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대사동에서 윤년 음력 정월 열나흗날 장승에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대사동은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윤년에 한 차례 장승제를 지낸다. 제삿날은 음력 정월 열나흘이다. 마을 어귀에는 본래 숲이 무성하였다. 마을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면 왼편에 천하대장군, 오른편에 지하대장군을 지나야 한다. 주민들은 마을의 수문장이나 다른 없는 장승을 정성껏 위하였다.
남녀 목장승 옆에는 솟대가 세워져 있다. 솟대는 짐대 또는 오릿대라고도 한다. 마을에서는 장승을 서낭, 그리고 장승제를 서낭제라고도 한다. 마을 어귀 오른쪽에 성황당(城隍堂)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장승제에 이어서 성황당제를 지내는 것으로 보면 아주 오래전에 부근에 서낭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장승을 수살(守煞)로 인식한다. 마을 어귀의 신앙대상물은 대개 살을 막는 역할을 하기에 수살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다. 대곡리 장승제는 세종특별자치시 향토문화유산 제47호로 등록되어 있다.
[연원 및 변천]
약 400년 전 연안도호부사 박승조가 가솔을 이끌고 정착한 후 대사동 마을에 수구를 막는 산이 없어 수구막이를 위하여 마을 입구에 숲을 조성하고 성황당 신과 함께 장승을 세우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대사동[한절골] 장승은 마을 입구 양쪽에 있다. 대사동 장승은 전형적인 목장승의 외형을 갖추었다. 남장승의 머리 부분은 전체 키의 1/3 정도를 차지한다. 머리에는 사모를 썼고 눈과 코는 돋을새김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눈은 양옆으로 치켜 올려 뜬 것으로 표현하여 위협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귀는 숫자 3과 유사하다. 입은 직사각형 테두리 안에 횡으로 2칸을 나누어 이빨이 난 것처럼 표현하였다. 여장승도 거의 동일한 수법으로 깎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에 족두리를 씌우고 이마에 곤지를 새겼다. 장승 옆의 솟대는 장승 키의 2배 정도 된다. 오리의 머리와 목은 ㄱ자형 나뭇가지에 눈과 깃털을 먹으로 그린 것이다. 솟대를 수살대라 하여 몸통 뒷부분에 15~20㎝ 정도의 소나무 가지를 꽂았다. 장승제를 모실 때에는 소나무 가지에 한지로 만든 깃발까지 단다. 오리는 3~5m 정도 되는 소나무 장대에 꽂고 머리 방향이 마을 밖을 향하게 한다. 그래야만 오리가 마을 안의 액운과 잡귀를 모두 몰아서 마을 밖으로 가지고 날아간다고 한다.
[절차]
장승제는 윤년이 드는 해 정월 열나흘에 모신다. 장승제를 지내기에 앞서 깨끗한 사람으로 제관, 축관, 공양주를 선출한다. 공양주는 제물을 장만하는 사람이고 제관과 축관은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다. 제관으로 뽑히면 매사에 부정을 피하고 근신한다. 대문 앞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놓는다. 정월 열나흗날 해가 지면 제관 일행은 정성껏 마련한 제물을 가지고 제장으로 향한다. 제상에 백설기, 포, 삼색실과 등 준비한 제물을 차린다. 준비가 끝나면 제관이 앞으로 나와서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이어서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마지막에는 가가호호 대주 소지(燒紙)를 전부 올리며 집안이 평안하길 빌어 준다.
[현황]
대사동 장승은 오랜 시간 마을의 평안과 안녕을 관장하는 수호신으로 대사동 마을 주민들에 의해 모셔지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장승제를 전승하고자 하는 의지도 강한 편이다. 일제강점기와 제3공화국 시절 미신타파정책 때 단절될 위기가 있었지만 2019년 현재까지 마을의 고유 공동체 신앙이자 민속 문화로 유지·보존되어오고 있다. 2002년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의 초청을 받아 장승 제작 시연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부여문화원이 주관한 전국 장승 제작대회에 나가서 2등을 차지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