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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의 출가 노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470
한자 濟州海女-出嫁勞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은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시기/일시 1903년 - 제주 해녀들 도쿄부(東京府)의 미야케지마(三宅島)로 출가
발생|시작시기/일시 1927년 - 제주 해녀들 가고시마현(鹿児島県)으로 출가
발생|시작시기/일시 1928년 - 제주 해녀들 고치현(高知県)으로 출가
전개 시기/일시 1933년 - 제주 해녀들 중국 칭따오로 출가
발생|시작 장소 제주 해녀의 출가 노동 - 일본 미야케지마를 시작으로 주로에서 이루어짐

[정의]

일제강점기에 제주 해녀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한반도·일본·중국·러시아로 나아가 바다물질을 한 일.

[개설]

해녀의 출가노동은 바깥물질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해녀(海女)’라는 말은 문헌에 간혹 등장하지만, 잠수하는 여성의 개념은 아니었다. 문헌에서는 바다를 대상으로 일하는 일반 여성 어민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유사한 말로는 포녀(浦女)가 있다. 해녀는 썰물 때 조개를 잡거나 잠수하지 않고 해산물 캐는 여자를 말하고 있지만, 연구자들이 일본의 해녀인 아마를 염두에 두고 해녀라는 말을 제주에 정착시켰다. 다시 말해, 원래 해녀는 갯가에서 간단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반적인 여성 어민을 말하는 것이며, 녀(潛女)는 바다 깊이 잠수하여 해산물을 따는 직능을 가진 여자를 말하는 것이다. 해녀는 원래 말인 녀(潛女)·수(潛嫂)·녜(潛女) 등으로 부르고, 어린 해녀를 아기수·기능이 뛰어난 해녀를 상수·물질을 금방 배우는 얼치기 해녀를 똥군 수라고 불렀다.

해녀의 원조는 포작인이다. 포작인은 깊은 바다에 뒤웅박을 의지한 채 맨몸으로 잠수해 전복을 따는 남자를 말한다. 이 포작인들이 진상의 격군으로 동원되면서 바다를 건너다 죽거나 전복진상이 힘들어 도망가 버리면서 전복 진상에 차질을 빚게 되자 그 대안으로 미역 따는 잠녀를 뽑아 포작인으로 대체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해녀의 원조다. 해녀는 조선후기 진상할 전복을 따던 포작인의 역할을 물려받으면서 물질의 영역이 미역 따는 얕은 바다에서 전복 따는 깊은 바다로 확대되었다.

[역사적 배경]

제주 해녀가 집단적으로 출가를 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다. 출가 물질의 초기는 기후·풍토적으로 농경이 힘들고 제주 인근 바다의 해산물이 일본인 잠수기 어업으로 고갈되면서 해녀 채취물의 경제적인 효용 가치가 높아 갔던 무렵이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어민들이 한반도로 출어하기 시작하였는데, 1880년대 초부터는 일본의 잠수기 어선 137척이 전복을 200관씩이나 한꺼번에 채취해갈 정도로 잠수기 어업의 피해는 심각했다.

1895년부터 해녀들은 경상남도로 첫 출가 물질을 떠났다. 이후 해녀들의 출가 물질은 활발해졌으며, 그 범위도 경상도·다도해·강원도·함경도 등 육지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와 오사카, 중국 칭따오와 다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로 출가 물질을 나갔다. 특히 외국 출가 중에서 일본 출가가 많았다. 제주 해녀의 일본 출가는 1903년 미야케지마를 시작으로 주로 이에켄에서 이루어졌다. 이에켄 해녀들이 조선으로 출가했으나 제주 해녀에 비해 일의 능률이 떨어져서 오히려 제주 해녀들을 수입해 가기에 이르렀다. 일본 해녀의 조선 출가가 제주 해녀가 일본으로 출가 물질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초 해녀의 수는 900명이었으나 20세기 초·중반이 되면 10,300명으로 늘어났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해녀의 수는 증가하여 가내의 부족한 경제력을 충당하였다.

[변천]

서귀포시 해녀의 출가 물질은 칭따오 사례가 있는데, 1933년 우도의 문덕진 씨가 칭따오로 갈 제주도 상군 해녀들을 제주도에서 모집하였다.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표선면 표선리·우도면 성산읍 고성리 등의 상군 해녀들 80여 명을 전도금을 주고 모집하여 칭따오로 데리고 갔다. 1915년 육지에 출가한 해녀는 약 2,500명인데, 경남에 1,700명, 전남·다도해 방면에 300명, 기타 지역에 500명이었다. 해녀의 출신지는 서귀포시 법환리와 위미리 등이 각각 100명, 우도가 약 400명, 제주시 종달리, 행원리가 각 100명씩이고, 나머지는 기타 지역 출신이다.

1932년에 일본에 출가한 제주 해녀는 1,600 명에 이르고 있다. 같은 해 한반도에 물질을 나간 해녀의 수는 3,478명으로 전체 제주도 해녀 인구의 57%에 이른다.

해방 후 제주도 해녀의 수는 1946년에 10,124명, 1957년 27,553명, 1967년 23,979명, 1975년 11,316명, 1985년 7,649명, 1995년 5,886명, 2005년 5,545명으로 급감하고 있다. 1962년 한반도로 출가한 해녀는 4,000명, 이듬해는 그 수가 갑자기 줄어들어 2,215명이었고, 10년 뒤 1973년에는 867명으로 해녀들이 출가는 거의 소멸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로 볼 때 해녀 물질의 절정기는 한국전쟁 후인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였고, 1970년대 이후 해녀의 수가 급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2년 현재 해녀의 수는 5,000명 미만이며, 해녀 출가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해녀가 급감하는 이유는 해녀 물질이 과거처럼 딸에게 승계가 되지 않는 것이 원인 중 하나이며, 누군가 해녀를 자원해도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어촌계의 제도적인 장치가 없는 현실도 해녀 급감의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해녀 출가 노동, 곧 바깥물질은 일제강점기는 해외까지 진출했으나 해방 후 한반도로 국한되다가 점차 줄어들다가 소멸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의 식민지라는 특수성 때문에 해외에도 쉽게 진출했으나 해방이 되면서 국적과 국경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해녀 출가는 한반도 영토를 중심으로 국한되었다. 해녀의 수도 급감함으로써 해녀의 보존 문제가 현안으로 떠오를 정도로 앞으로 해녀의 존속마저 위기에 처해 있어서, 지금은 사실상 해녀 출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역사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해녀 출가 노동은 제주 역사 속에서 여성의 경제적인 능력을 발휘한 세계사에 유례없는 노동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험한 바다를 직장 삼아 목숨을 담보로 가족을 위해 노동을 했던 제주 해녀들의 삶에 대한 집념은 세계 여성사에 빛나는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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