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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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근대/일제강점기 |
집필자 | 박찬식 |
[정의]
1910년 일본에게 강제 병합된 뒤로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 서귀포 역사.
[개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한국의 역사는 타민족 일제의 지배하에서 더욱 심하게 왜곡되었다. 이 시기 제주 사회는 한국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심한 식민지적 수탈과 착취, 민족 차별적 탄압을 받는 가운데 이전 시기보다 예속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일제강점기하의 제주도]
식민지 지배 체제가 구축되면서 1915년 제주에는 도제(島制)가 실시되어 초대 도사(島司) 이마무라[今村鞆]가 부임하였다. 도사는 제주경찰서장을 겸임함으로써 행정과 경찰을 일원적으로 통치하는 막강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모든 관공서에 일본인이 배치되었고, 교육기관의 교장 및 교사들도 일본인으로 충원되었다.
1913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사업은 국·공유지가 많았던 제주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과거 목장토와 역둔토를 경작하던 빈농과 화전민들은 토지조사사업과 화전 경작 금지에 따라 경작지를 구하지 못하여 외부에서 생활 기반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도민 대부분이 빈궁과 기아 속에서 살아가게 되고, 이의 탈출을 위하여 일본 등으로 나가 열악한 조건하에서 탄광이나 방직공장 등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특히 1923년 제주도와 일본 오사카[大阪] 사이에 직항로가 개설되면서 제주도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도항하여 갔다. 1920년 여름에는 콜레라가 4개월 동안 유행하여 도민 4,134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일제는 1912년부터 도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해안일주도로 포장에 나서서 1918년에 확장을 끝냈다. 일주도로는 제주의 각종 산물을 산지·한림·성산포·서귀포 등 항구로 쉽게 수송하여 외부로 반출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도민들에게 신작로라 불리던 일주도로의 개설로 조선시대 이래 대촌(大村)이었던 성읍·홍로·명월·대정과 같은 마을은 쇠락하고, 성산포·서귀포·한림·모슬포 등이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일본을 통한 자본의 유입으로 제주도민들의 생활이 일부 향상되었는지는 몰라도, 제주도의 자생적 발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 전시체제로 접어들면서 제주도를 주요 군사기지로 인식한 일제는 섬 전역에 군사시설을 강화시켜 갔다. 군사시설 공사에는 많은 제주도민들이 동원돼 고초를 겪었다. 제주도 내에는 일제 말기 일본군이 조성해 놓은 거대 군사 시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상당수의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전시 총동원령에 따라 징병·징용·정신대 등의 명목으로 부역 동원되거나 전장으로 끌려갔다.
침탈과 저항의 역사로 점철된 일제강점기에도 제주 사회는 꾸준히 내면적인 변화의 움직임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인구는 이전에 비해서 급격히 늘었고,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수많은 제주민들이 일본 오사카의 공장을 찾아 제주바다를 건넜다. 잠녀들은 무리를 지어 남해·동해·일본 연안 등으로 출가 잠수 노동에 나섰다. 이제 제주 사람들은 제주도 안에 갇혀 살지 않고 밖에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갔다.
[일제강점기하의 서귀포]
원래 서귀포는 남제주의 중앙에 있어 예전엔 소수의 주민만이 사는 한촌이었지만, 일제가 1916년 제주도의 지청을 여기에 개설한 이래 경찰관주재소·등기소·우편소·학교 등이 속속 설치되었다. 한편 서귀포항은 어업 근거지로 적당하기 때문에 각 지역으로부터 황돔과 주낙의 발동기선 등 각종 어선이 모여들게 되면서부터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 일본 잠수기업자와 어민이 상당수 서귀포에 거주하였고, 이들에 의해서 통조림공장·조개단추공장 등이 설립되었다.
한편 서귀포를 통하는 교통망은 우선 도로와 항로를 통하여 연결되었다. 도로는 1912년부터 1913년에 걸쳐 도민에게 부역을 과하여 전도적인 순환 일주 도로가 개통되었다. 또한 한라산 중턱을 횡단하여 서귀포로 통하는 도로가 1932년 개통됨에 따라서 서귀포의 물자가 제주성 내로 원활하게 유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