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4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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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抗日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찬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3월 21일 - 조천면 미밋동산에서 만세시위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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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9월 - 제주청년연합회 창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1년 - 해녀항쟁 |
항일투쟁 - 법정사를 중심으로 한 서귀포 중문 지역 |
[정의]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 전까지 서귀포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독립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에 제주도민들은 적극적으로 항일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이미 1918년 법정사(法井寺)를 중심으로 중문 지역의 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항일투쟁을 전개함으로써, 3·1 운동이 있기 전 처음으로 일어난 대중적인 항일투쟁으로 기록되었다.
[제주도 내의 항일운동]
제주도에서의 항일운동은 조천면의 1919년 만세시위운동으로 절정에 달하였다. 조천리 출신의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은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삼촌 김시범·김시은 등과 의논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21일 조천 미밋동산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행진에 돌입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는 함덕리·신촌리 등 조천면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조천에서 비롯된 1919년 제주도의 3·1 운동은 제주도민들, 특히 청년층의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자 청년들의 향학열이 달아올라 야학 등 민족교육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계몽운동을 위주로 한 각종 단체가 지역별로 조직되어 갔다. 1925년 9월에 제주읍을 비롯한 각 지역에 조직된 청년회를 하나로 묶어 내고, 전국적 조직인 조선청년총동맹과 연결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결과 ‘제주청년연합회’가 창립되었는데, 제주청년연합회는 1928년 8월 모슬포에서 정기대회를 열어 조직체를 ‘제주청년동맹’으로 변경하여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항일활동을 펼쳤다.
1930년대로 접어들자 제주도에서의 항일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 시기 운동의 특징은 주로 청년·학생층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을 전개하고, 해녀 투쟁과 같은 대중운동도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도 각 지역에서는 청년·학생들이 반일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1930년대 최고 절정을 이루었던 운동은 해녀들의 투쟁이었다. 이 운동은 1931년부터 1932년 초까지 구좌면·성산면의 6개 마을 잠녀들이 관제화된 해녀조합의 횡포에 저항하여 일본인 도사(島司)를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투쟁에는 연인원 1만 7천여 명이 참여하였고, 검거된 사람만도 1백여 명에 이르는 제주도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여성운동·어민투쟁이었다. 해녀 항쟁 이후 제주도의 항일운동은 다수의 주도 청년들이 검거되어 버림으로써 그 맥이 단절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하로 잠적하였던 청년 일부가 흩어져 있는 운동가들을 규합하여 한림과 애월, 조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혁명적 농민조합의 건설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 또한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었고, 1940년대 전시체제하에서 도민들은 징병·징용·강제 노역 등으로 사상 최고의 압박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서귀포 지역의 항일운동]
1918년 서귀포 중문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은 민족의식을 가졌던 일부 불교도들과 민족종교인 선도교[보천교] 교도와 중문 지역민을 비롯한 제주도민이 결합된 항일운동이었다.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되기 1년 전에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한국사에서도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서귀포에서도 해상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1 운동 이후 1920년대 중반에 서귀포 지역에는 여러 청소년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이 단체들은 항일 민족의식을 키워 나감으로써 많은 항일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의의와 평가]
1930년대 들어와서도 지역별로 청년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는데, 당시 청년들이 주력하였던 것은 야학과 독서회를 통한 교육계몽 활동이었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서귀포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천주교 신부와 교민들이 반일활동을 전개하다가 검거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