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4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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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榮號沈沒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승희 |
[정의]
1970년 12월 15일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포항에서 출항한 부산~제주 간 정기여객선인 남영호가 침몰한 사건.
[개설]
남영호(南榮號)는 중량 362톤, 길이 43m, 폭 7.2m, 시속 15노트, 정원 302명이 승선 가능한 철선으로, 남영상사[대표 서몽득]가 경남조선에서 건조하였다. 1968년 3월 5일 서귀포~성산포~부산 간 노선을 첫 취항하였고, 매달 10회씩 정기적으로 왕복 운항하던 정기 여객선이었다.
여객선이 대형화·현대화되기 전까지 기상 조건이 나쁜 제주와 타 지역[육지] 간 해역에서의 사고가 잇달아 발생했다. 이에 1952년에 교통부는 해난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1953년 1월 전체 여객선을 대상으로 일체 임시 선박검사를 실시하고, 같은 해 3월 15일부터는 야간 운항을 금지시키는 한편 제주항에 선박 임검소를 설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귀포 관련 항로에서 크고 작은 해상 사고가 발생하게 되는데, 1966년 11월 13일 서귀포~부산 간 부정기 여객선 해연호의 침몰사고, 1975년 2월 6일 한성해운 소속 서귀포~부산 간 정기 여객선 덕남호의 침몰사고, 그리고 1970년 12월 15일에 발생한 대형 해상사고로서 서귀포~부산 간 정기여객선 남영호 침몰 사건을 들 수 있다.
[경과]
남영호는 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경 서귀항에서 승객 210명과 연말 성수기용 감귤을 싣고 출항하여 성산항에서 승객 121명과 화물을 더 싣고 밤 8시 10분경 부산을 향해 출항했다. 선박회사 측은 3개의 화물창고가 모두 감귤 상자로 채워지자 선적이 금지된 앞 하창(荷倉) 덮개 위에 감귤 400여 상자를 더 쌓아 실었고, 중간 갑판 위에도 감귤 500여 상자를 쌓아 실어 서귀항을 출항할 때부터 이미 선체 중심이 15도쯤 기울었으며, 만재흘수선(滿載吃水線)이 물속에 잠겨 복원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성산항에 도착하자 다시 화물을 더 실었던 것이다.
이후 남영호가 성산항을 떠난 지 5시간 25분이 지난 새벽 1시 20분경 전라북도 상일도 동남 28마일 해상[쓰시마섬 서쪽 1백㎞ 해상]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심한 바람이 남영호 우현 선체에 몰아치더니 갑판 위에 쌓아 놓은 감귤 상자가 갑판 좌현측으로 허물어졌다. 순간 중심을 잃은 선체가 좌현으로 넘어지면서 선체가 기울면서 중심을 잃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남영호는 이에 정상 속도인 15마일을 10마일로 줄여 계속 항진하려 했으나, 결국 전라남도 여수시 소리도 인근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사고가 발생하자 긴급구조신호(SOS)를 타전했으나 해상 부근 어느 무선국에서도 이 조난 신호를 포착하지 못했다. 당시 이 남영호는 정원이 290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승객 311명과 선원 20명 등 331명을 태워 정원보다 41명이나 초과하였고, 당시 남영호가 출항하기 전날까지 폭풍주의보가 발효되어 4일간 제주 지역에 묶여 있던 승객과 감귤 등 화물 400톤 이상을 무리하게 실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남영호가 1차적으로는 하중을 감당하지 못해 전복된 것으로 보이나, 내부적으로는 선장이 항해 10일 전에 바뀌어 서귀포~부산 간 항로에 경험이 부족한 을종 2등 항해사[지금의 5급 항해사] 면허를 가진 강태수가 선장 임무를 맡았던 사실 또한 이 같은 참사를 있게 한 원인 중 하나로 보고 있다. 이러한 운항 과실과 더불어 낙후된 선박 시설 및 기관, 특히 무전시설 또한 남영호 침몰의 원인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단속해야 할 경찰과 해운 당국의 감독 소홀로 인해 발생한 참사였다.
[결과]
남영호 침몰 사고 당시 이 부근을 순시 항해하던 일본 해상안전부 제7관구 소속 ‘구사가키’ 순시선이 승객 최옥화[당시 55세, 제주 북제주군 구좌읍 종달리] 등 4명을 구조하였고, 뒤늦게 출동한 우리나라 경비정과 해군 함정에 의해 강봉수 등 8명이 구조됨으로써 남자 6명, 여자 6명 등 총 12명만 살아남고, 319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서귀항에는 임시대책본부가 설치되어 유족 1천 여 명의 애끓는 통곡 소리로 평화롭던 서귀포 지역은 아수라장이 되었으며, 남영호가 떠났던 자리에는 위령탑을 세워 그 날의 원혼을 달래었고, 위령탑은 1982년 서귀포항 임항도로 개설로 인해 서귀포시 돈내코 법성사 인근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남영호 침몰 사건은 어선 조난사고로 오인한 치안 당국의 구조작업이 늦어지면서 319명이 숨지고 막대한 재산 피해를 내는, 건국 이래 최악의 해난사고를 기록되었고, 이 사고로 임검 경찰관 4명이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되고 서귀포경찰서장이 입건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나라 최대의 해난사고로 기록될 만큼 끔찍했던 남영호 침몰 사건 이후 정부 당국에서도 해상 안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여객선이 대형화되고 레이더 등 안전 장비가 갖추어지면서 해상사고가 크게 줄어드는 계기를 만들었고, 해상 구조 또한 신속히 이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