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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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獨立運動家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찬식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지역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강점에 대해 저항하여 독립을 위해 투쟁한 운동가.
[개설]
일제 강점기 제주 지역 독립 운동가들은 상업·금융업·해운업·자영업과 같은 자본과 밀착된 직업, 교사·신문기자와 같은 지식인 출신의 직업이 상대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당시 제주도의 사회운동이 사회·경제적으로 일정한 경지에 도달해 있는 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경향성은 해녀 항일 투쟁 이전 시기[1910~1931년] 운동가들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의 운동은 중소 자본가와 지식인 위주의 운동이었다. 송종현·한상호·김택수·강창보·윤석원 등 신인회(新人會)를 중심으로 초기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생활 정도는 모두 보통 이상으로 기록에 나타나 있다. 또한 1929년에 적발되어 피검된 아나키즘에 입각한 ‘우리계’ 소비 조합 비밀결사 사건에 연루된 자들의 경우에는 매달 3원씩을 출자하여 활동 자금으로 축적시킬 정도로 자본력을 구비하고 있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 전반의 분수령을 이루는 최대의 사건인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사건으로 검거된 자들의 경우 거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교사와 신문기자였다. 이는 당시 제주도 독립운동이 지식인 위주의 상부 지도 조직을 중심으로 한 운동에 주력하였음을 말해 준다. 결국 이들은 1932년 해녀 투쟁 이후의 운동을 발전적으로 지속시키지 못하고 대거 검거됨으로써 운동의 맥이 단절되어 버렸다.
일제하 제주도 독립 운동이 내륙 지방의 전체 운동과 다른 특징은 일본, 특히 오사카와의 연관성이 깊다는 것이다. 이는 1923년부터 제주도와 오사카와의 직통 정기 항로가 열리면서 도민들이 일본을 왕래할 수 있는 기회가 확대되었던 데 연유한다. 당시 도민들은 생활고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대거 도일하여 대판의 공장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선진 노동운동을 실제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에는 일본 내의 조선노동조합총동맹을 비롯한 조선인 조직과 일본 공산당 및 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와 같은 일본인의 조직에 참여하여 핵심 구성원으로 활약하는 자도 있었다. 김문준·김달준·조몽구·강규찬·현호경·김용해·강창보·송성철 등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일제하 제주도 독립 운동가들 중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매우 많았다. 타 지역보다 제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데에는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제주 지역은 토지가 척박하고 주민들은 대부분 소규모 민유지를 소유한 자작농이었기 때문에 지주전호제가 발달하지 못했다. 또한 지역 사회를 주도할 강력한 유림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근대 이행기에 부르주아 민족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토착 세력이 미약했다. 오히려 섬이라는 조건에서 빚어진 독자적 정치·사회·경제 구조를 오래도록 유지해 왔기 때문에, 문화적 연대감과 공동체 의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강하다. 이러한 역사적 조건이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이 제주 지역에 걸맞은 이념으로 쉽게 파급될 수 있었다.
[서귀포 지역의 독립운동가]
1918년 중문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법정사 항일운동]을 주동한 승려 김연일(金連日)과 선도교(仙道敎) 수령 박명수 등 66명이 일경에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2년 가파도 출신 김한정의 영향 아래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문 출신의 청년들이 검거되어 재판을 받았다. 1935년에는 서귀면을 중심으로 하여 독서회 활동을 펼치던 송순혁 외 40여 명을 검거되기도 하였다. 기타 국내 및 일본에서 다수의 서귀포 출신 활동가들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