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0310 |
---|---|
한자 | 老江書院設立論難 |
영어공식명칭 | Controversy over the Establishment of Nogang-seowon |
이칭/별칭 | 노강영당(老江影堂) 설립 논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정철 |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지역에서 노강서원의 설립을 두고 벌어진 논란.
[개설]
노강서원 설립 논란은 18세기 전반 남인 세력이 강했던 영남에서 노론계 서원인 노강서원의 설립 추진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이다. 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서인이 남인의 근거지였던 영남에서 서인 계열의 노론 세력 확산을 위해 노론계 서원을 세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1702년(숙종 28) 노론계 인물인 이지완(李志完)[1668~1755]이 이이(李珥)[1536~1584]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배향하자는 주장을 처음 제기했고, 성주 지역 노론 가문들과 노론계 성주 수령들의 도움으로 서원 건립이 추진되었다. 그 과정에서 영남의 주류였던 남인 세력과 치열한 갈등이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인조 대의 정권은 서인이 남인 일부를 흡수한 연합 정권으로 시작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며 두 세력 간에 정치적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후 숙종 대의 갑술환국[1694년]을 기점으로 중앙 정계에서는 남인들이 거의 축출되었다. 하지만 영남에서는 남인들이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남인 세력 주류는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이황(李滉)[1501~1570]의 학문을 토대로 사회질서 전반에 대한 기존의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하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 남인들 중 다수가 점차 노론으로 전향하였다. 남인 주류의 강경한 입장이 남인 세력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고, 중앙 정치가 서인 주도로 운영되는 것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였다. 영조 대의 무신란[1728년]은 이런 경향을 더욱 강화한 사건이었고, 이후로 영남은 ‘반역향’으로까지 지목되었다.
노론 세력은 영남의 남인 세력을 무력화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그 핵심적인 정책은 남인의 지역 거점인 영남에다 노론계 서원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1702년 상주 흥암서원(興巖書院)[경상북도 기념물]과 청송 병암서원(屛巖書院)의 건립을 시작으로 영남 지역에 노론계 서원들이 속속 들어섰다. 1704년(숙종 30)에는 송시열의 유배지 거제현에도 반곡서원(盤谷書院)이 건립되었고, 1707년(숙종 33)에는 또 다른 유배지인 장기현(長鬐縣)[현 경상북도 포항 지역]에도 죽림서원(竹林書院)이 건립되었다. 노강서원의 설립도 이런 맥락이었다.
[경과]
1702년 벽진 이씨(碧珍李氏) 가문 출신의 이지완이 이이와 송시열을 배향하자는 ‘노강(老江) 건원론’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노강’이라는 명호(名號)는 이이와 송시열이 성주에 내왕했을 때 노다촌(老多村)과 인연이 있었던 것과 노다촌의 위치가 낙동강 변이었다는 것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건립 추진 세력은 이지완과 수성 나씨(錦城羅氏) 나학순, 다산(茶山)의 윤씨, 암동(巖洞)의 이씨, 오산(午山)의 박씨, 천평(泉坪)의 이씨, 죽곡(竹谷)의 이씨, 장전(長田)의 박씨, 비곡(非谷)의 정씨, 후동(後洞)의 김씨 등 10개 가문의 연대 세력이었다. 이지완 등은 반곡 죽림서원을 건립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노론의 강경파 목사 김상직(金相稷)의 협조를 얻어 발의 10년만인 1712년(숙종 38) 2월 12일 송시열을 독향하는 ‘노강영당(老江影堂)’으로 건립되었다. 노강영당, 즉 후의 노강서원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조선 시대에는 성주군 벌지면 송곡리였다가, 1906년(고종 43)에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로 행정 구역이 변경되었다. 초대 원장으로는 건립에 큰 도움을 준 옥천 전씨 가문의 전극화(全克和)를 추대했고, 장의(掌議)로는 나학제(羅學濟) 이하식(李夏埴), 유사(有司)로는 김린(金潾)을 선발하였다. 이듬해인 1713년(숙종 39) 2월 송시열의 수제자 권상하가 작성한 봉안문으로 영정을 모셨고, 1722년(경종 2)에는 성주에 유배 와 있던 민진원의 글씨로 새긴 현판을 걸었다.
당시에 서원 건립은 첩설 금령을 피하기 위해 영정, 사묘, 정사, 서당 등으로 발의하여, 차후 서원으로 승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노강서원도 금령을 피해 처음에는 영당으로 건립했다가, 강당과 재사 건립을 계기로 서원으로 승호(陞號)하였다. 노강서원으로 승호하고 서원으로서의 기반 구축에 일조한 이는 정철(鄭澈)[1536~1593]의 후손으로 1740년(영조 16)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정익하(鄭益河)였다. 정익하는 노강서원 경원장(京院長)에 취임하면서 강당과 재사(齋舍)를 일신(一新)하는 등 서원 형세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때 향원장(鄕院長) 윤선(尹㶍)과 이지완도 크게 힘을 썼으며,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노론계 가문이던 파평 윤씨(坡平尹氏), 옥천 전씨(沃川全氏), 단양 우씨(丹陽禹氏) 가문에서도 협력하였다.
[결과]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 존립하게 된 노강서원은 노론의 정치적 입장에 부합하는 당파적 활동을 전개하면서 지역의 남인계 사족과 대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경상북도 성주 지역은 영남 남인의 주요한 거점이었지만 노론 세력도 존재하였다. 중앙 관료를 배출한 가문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중앙의 노론 세력이 영남에 노론계 서원을 설립하여 세력을 확대하려 했을 때, 영남의 다른 지역보다는 상대적으로 쉽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 증거가 노강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