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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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有容 |
이칭/별칭 | 덕재(德哉),뇌연(雷淵),소화(小華),문청(文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덕재(德哉), 호는 뇌연(雷淵), 소화(小華). 서울 출신. 증조는 대제학 남용익(南龍翼), 할아버지는 대사헌 남정중(南正重),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남한기(南漢紀)이며,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활동사항]
1721년(경종 1)에 진사가 되고, 강릉참봉(康陵參奉), 종묘서부봉사(宗廟署副奉事),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侍直),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형조좌랑(刑曹佐郞),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지낸 뒤 1740년(영조 1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해에 정언(正言)이 되어 간관지책(諫官之責)에 대한 상소로 해남으로 찬배되었고, 1747년(영조 23) 응교로 재직시 군덕10조(君德十條)를 진언하여 군주의 성실을 강조했다. 이듬해 통정(通政)으로 승진한 뒤 승지, 판결사, 형조참의를 거쳐 승문원제조, 대사성, 예조참판, 예문관제학, 홍문관제학 등을 역임했다.
1754년(영조 30)에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세손인 정조를 무릎에 앉혀놓고 글을 가르쳤다. 1755년『천의리편(闡義理編)』의 찬집당상을 겸직하고,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세자좌부빈객, 병조참판, 대사헌, 대사성 등을 거치고, 1757년에는 원손사부(元孫師傅)가 되어 호랑이 가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참판, 대제학,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역임한 후 1765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1766년 정헌(正憲)으로 승진한 뒤 사직소를 올렸고, 이듬해 봉조하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1772년 『명사정강(明史正綱)』을 편찬하여 장차 『조선사기(朝鮮史記)』를 편찬할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측책문을 제진하여 칭송을 받았다. 인물됨이 실박하면서도 바른말을 잘하고 청백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명사정강(明史正綱)』, 『천의리편(闡義理編)』, 『뇌연집(雷淵集)』이 있으며, 작품으로는 단양에 있는 우화교비(羽化橋碑)와 해백윤세수비(海伯尹世綏碑)를 쓴 글씨가 있다.
[묘소]
묘는 분당구 율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