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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항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607
한자 農民抗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정은경

[정의]

전근대사회 및 일제강점기 때 농민들이 지배세력에 대항하여 벌인 저항운동.

[개관]

농민들은 총체적인 봉건사회의 억압하에 어떠한 사회적, 신분적 모순을 의식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나 19세기 근대사회가 태동하여 봉건사회체제가 무너지면서 농민은 점차 봉건적 모순을 자각하게 되었다. 농민들이 집단을 이루어 봉건적 모순에 저항하며 개혁운동을 폄으로써 우리나라 농민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성남지역 농민항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봉건적 모순의 심화와 더불어 제국주의의 침탈과정에 놓여있었던 19세기였다.

[전개]

조선 말 삼정문란 등으로 수탈의 대상이었던 농민층이 집단적으로 봉기한 임술농민항쟁은 1862년(철종 13) 성남지역에서도 발생하였다. 이러한 봉건적 모순은 1894년에 더욱 심화되어 농민항쟁은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 1895년부터 일제 침략에 대항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농민들은 의병들과 합세하여 침략군과 싸웠다. 의병운동은 초기부터 위정척사적인 유림세력이 주도하였지만, 1905년 이후에는 평민층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고 광범위한 농민층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성장하였다. 일제치하에서 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 결과 대부분의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이 가운데 농민의 민족의식은 더욱 고조되어갔으며, 3,1운동을 전 민족항쟁의 독립운동으로 대중화시켜갔던 것이다.

(1) 임술농민항쟁: 성남지역에서 가장 고질적인 봉건적 모순은 바로 환곡이었다. 조선시대 개성, 강화, 광주, 수원지역에 설치한 4유수체제 가운데에 성남지역은 광주부에 속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일찍부터 수도 한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여 수도방어 체제상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부각되어 남한산성이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수어청이 남한산성에 소재함으로써 그 소관의 많은 군량미가 광주부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타지역보다 많은 환곡을 운영하는 과정에 많은 부정부패가 행해져 상당히 문란하였다.

임술년(1862년)에 환곡의 문란상이 극에 달하자 이 지역 1천여명의 농민들은, 정부측이 문제 해결책으로 제시한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으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악폐가 발생하자 마침내 봉기하였다. 농민들은 1862년 10월 23일경 광나루, 송파나루, 삼전도, 동작나루를 통해 한강을 건너 서울로 몰려들어가 이정절목을 작성하였던 이정청 당상 조두순(趙斗淳)과 정원용(鄭元容)의 집앞에서 농성하였다.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발생하는 상황이었지만, 광주지역은 수도 한양과 지척지간이었기에 봉건정부는 상당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주모자를 색출하여 엄벌에 처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삼정이정절목」의 폐지를 선언한 후에야 이 지역의 농민항쟁이 가라앉았다.

성남지역 임술농민항쟁에서 농민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광주부 자체지역에서 봉기하지 않고 직접 한양 도성으로 몰려갔다. 한양과 인접한 탓도 있으나, 수어청이 소재한 남한산성의 군세(軍勢)가 강하였기 때문에 광주지역내에서의 농민봉기는 상당히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까닭에 타 지역에서와 다른 농민봉기의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2) 동학농민운동: 봉건적 모순은 1894년에 더욱 심화되어 농민항쟁은 동학농민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이제는 단순한 농민봉기가 아닌, 국가적 차원의 문제해결을 요구하는 농민전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성남지역에 동학사상이 전파된 시점은 1860년대이지만, 본격적으로 활동을 보인 시기는 188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이 시기에는 안교선(安敎善) 주도로 수원 지방을 비롯한 경기도 지역에 동학사상이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 이에 따라 안승관(安承寬), 김내현(金來鉉)이 각각 기호대접주와 기호대접사로 임명되었다.

농민전쟁 발발 이전에 교조신원운동 단계부터 광주부 동학교도는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보은집회에서는 ‘광의(廣義)’라는 깃발을 내세우며 동참하였으며, 이후 농민전쟁에 돌입하여서는 경기도를 총괄하는 경기도사의장 이종훈(李鍾勳) 지휘하에 북접에 소속되어 2차 농민전쟁 시기에 기포(起包)하였다. 염세환(廉世煥) 주도의 광주뿐 아니라 경기도지역 거의 대부분에서 농민군이 기포하여 합세하였다.

북접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주로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2차 농민전쟁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던 반면에, 광주부 잔류 농민들이 광주지역에서 국지적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남대희(南大凞) 주도로 광주부 백성들이 남한산성으로의 길을 차단하여 곡물과 다른 물자가 반입되지 못하자, 1894년 11월 11일 연락을 받은 일본군은 오전 6시에 경성을 출발하여 그날 오후 3시경에 광주에 도착하여 신속하게 진압시켰다. 광주부는 당시 농민군 진압을 위한 일본군 인천병참사령부의 동쪽 진출로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광주부의 농민항쟁을 쉽사리 일본군 본부에서 포착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한 대응책 역시 신속할 수밖에 없었다.

(3) 의병농민운동: 동학농민운동이 끝난 뒤 1895년부터 일제 침략에 대항한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농민들은 의병들과 합세하여 침략군과 싸웠다. 의병운동은 초기부터 위정척사적인 유림세력이 주도하였지만, 점차 1905년 이후에는 평민층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고 광범위한 농민층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성장하였다. 이 시기에 광주(성남) 지역 농민들도 의병운동에 활발히 가담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강제시행으로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광주, 이천 등 경기 지방 의병들은 김하락(金河洛), 구연영(具然英), 김태원(金泰元), 신용희(申龍熙), 심진원(沈鎭元) 등이 중심이 되어 약 2천여명의 군세로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남한산성이 요새지인데다 산성수축은 물론 군사 및 군량 무기 등이 비축되어 장기항전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조성학, 김태원, 심진원 등이 1896년 1월 18일 백현고개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며, 2월 28일에는 광주 의병부대와 이천 의병부대가 합세하여 격전끝에 남한산성을 완전 점거하였다. 그러나 3월 중순부터 일본 친위대 및 강화 진위대 병력이 포위공격하자, 전기의병(前期義兵) 중 가장 치열한 전투끝에 결국 20여일만에 남한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 후 광주지역에선 정미의병 시기에도 이익삼, 서가, 윤전, 임문순 등이 활약하였다.

(4) 3.1운동: 일제치하에서 총독부의 대규모 토지약탈을 가져온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약 77.2%의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이 가운데 농민의 민족의식은 더욱 고조되어갔으며, 3.1운동을 전 민족항쟁의 독립운동으로 대중화시켜갔던 것이다.

광주(성남) 지역의 만세운동은 중부면, 대왕면, 돌마면낙생면의 연합시위로 전개되었다. 중부면에서는 1919년 3월 27일 새벽에 주민 300여명이 남한산성에 진입하여 시위를 벌였으며, 이 가운데 면장을 폭행하는 과격한 양상도 나타났다. 대왕면에선 송파시위에 참가했던 이시종(李時鍾)이 주도하여 100여명을 규합,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돌마면에서는 3월 26일에서 28일까지 3일간에 걸쳐 돌마면 율리한순회(韓順會), 한백봉(韓百鳳)과 전 낙생면장 남태희(南台熙) 등의 주도로 돌마면낙생면 면민이 합세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특히 천도교 광주교구장이었던 한순회는 면내 각 리의 유지들과 모의하여 3월 27일 분당리 장날을 이용하여 봉기하기로 계획하였다. 27일 수백명이 분당리 장터에 집결하여 만세시위에 들어갔으며 28일에는 대왕면민까지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1천여명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결국 한백봉을 비롯한 수십명이 체포당하고 시위군중은 해산당하였다.

[의의]

이때 활약한 한순회, 한백봉 등은 1927년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의 광주지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이후 산미증식계획과 각종 잡세, 증세에 시달린 농민들은 적극적 투쟁으로 맞서나갔다. 성남지역 농민들도 자료의 한계로 구체적 양상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소작료인하투쟁 등과 같은 소작쟁의와 더욱 적극적인 정치투쟁의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일제하 성남지역의 농민운동은 전체 민족해방운동의 흐름과 맞물려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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