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1021
한자 三學士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문수진

[정의]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로서 청의 요구에 강하게 척화소(斥和疏)를 올린 세 사람의 학사.

[내용]

홍익한(洪翼漢)[1586~1637], 윤집(尹集)[1606~1637], 오달제(吳達濟)[1609~1637]를 말한다. 1671년(현종 12) 송시열이 지은 『삼학사전(三學士傳)』에서 이들을 ‘삼학사’라 불러 그 이름으로 전하게 되었다.

홍익한은 진사 홍이성(洪以成)과 김림(金琳)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 이정구(李廷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광해군 치세시에 출사가 늦어졌으며, 병자호란 때 사헌부의 장령으로 있으면서 청이 황제를 칭함에 맹렬히 논박하여 최명길이 평양 서윤(庶尹)으로 보냈다.

윤집은 현감 윤형갑(尹衡甲)과 관찰사 황치경(黃致敬)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으로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직전 홍문관교리로서 언관의 핵심에 있으면서 척화소를 올렸다. 척화대신 김상헌의 조카딸과 혼인하였다.

오달제는 오윤해(吳允諧)의 아들로 서울에서 출생하여 백부인 청백리 재상 오윤겸(吳允謙)에게서 배웠다. 병자호란 당시 홍문관의 수찬으로서 언관직에 있으면서 척화소를 올렸다. 윤집과 함께 남한산성에 어가를 호종하였다.

이들은 모두 기호학파인 서인에 속하였으며 병자호란 당시 언관직의 핵심에 있었다. 1636년(인조 14)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는 군신관계(君臣關係)를 요구하자 이들 셋은 이 사신들을 죽여 모독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이듬해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견디다 못해 삼전도(三田渡)의 항복으로 굴욕을 겪으면서 화의가 성립되자 청의 요구로 이들 세 사람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홍익한은 1637년 2월초에 청군이 회군하는 길에 평양에서 잡혀서 25일에 청의 심양에 이르렀으며, 윤집오달제는 4월 15일에야 심양에 이르렀다. 19일 용골대가 왕명으로 이들에게 가족과 함께 청나라에서 살기를 권유하자, 이를 완강히 거절하여 윤집오달제는 서문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홍익한은 10월에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이 있고, 윤집오달제와 같이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평가]

한편 이들이 처형당하기 전에 청 태종이 친히 국문하였는데, 홍익한은 국문에 당당히 맞서 척화를 주장했던 떳떳한 대의를 밝히면서 나라에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이상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또한 윤집도 청 태종의 회유적 설득에 완강히 거부하고, 몸바쳐 나라를 구하려 하였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는 기개를 보였다. 이에 태종도 이들의 기개에 오히려 감탄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충의와 대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문을 내리고,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각각 내렸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