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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1663
한자 李匡德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연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별
생년 1690년연표보기
몰년 1748년연표보기
본관 전주
성뢰
관양|존제
주요 저술 『관양집』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뢰(聖賴), 호는 관양(冠陽), 존제(尊齋)이다. 이경석(李景奭)의 현손이고, 탕평론을 최초로 주창하였던 박세채(朴世采)의 외손자이며, 대제학 이진망(李眞望)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진사로서 1722년(경종 2)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에 시강원설서로 임명되어 왕세제(王世弟:뒤의 영조)를 보도(輔導)하였다. 소론 중 완소계열(緩少系列)의 일원으로서 송인명(宋寅明), 조문명(趙文命), 정석삼(鄭錫三) 등과 함께 탕평론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 김일경(金一鏡) 등과 갈등을 하였다.

1724년에는 정언과 부교리를 거쳐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민진원(閔鎭遠)을 구하려다가 오히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체직(遞職)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수찬·교리에 임명되었다가 1727년(영조 3) 호남에 기근이 심하여 별견어사(別遣御史)로 파견되었고, 돌아와 이조좌랑을 지냈다.

조태억, 조지빈의 부자와 홍문관 관원의 천거 문제로 갈등하다가 조지빈과 함께 파직되기도 하였다.

1728년 1월 호남의 감진어사(監賑御史)로 파견되었다. 그해 3월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고 전라도 태인에서 이인좌의 일당인 박필현(朴弼顯)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감사로 부임한 뒤 지방재정, 부세제도(賦稅制度) 등에 일대 개혁을 일으켰는데 오히려 원성을 들었고, 1729년 부수찬 이양신(李亮臣)이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소론을 몰아내기 위하여 이광좌(李光佐)를 탄핵할 때에 함께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무고로 밝혀졌다.

이듬해에는 이조참의를 거쳐 1731년에 승지를 지내고 1732년 다시 호남의 감진어사로 파견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 대사헌을 거쳐 1739년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대제학·예조참판을 지냈다.

1741년 아우인 지평 이광의(李匡誼)가 국문을 받자, 이광의를 구하려고 변론하여 정주에 유배된 뒤 다시 친국을 받고 해남에 이배되었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과천에 은거하던 중 1744년 서용(敍用)하도록 명이 내려졌으나 관직을 사양하였다.

[저서]

저서로는 『관양집(冠陽集)』이 있다. 그는 병려문과 시에 뛰어났다. 특히 그의 시는 꾸밈이 높고 날카로운 맛이 있으며, 의미가 정묘하므로 거의 한 시대의 으뜸으로 평가 받았다.

[묘소]

묘는 청계산의 서남쪽 구릉인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전주이씨 백헌공파에서 관리하는 묘역에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2.10.29 [활동사항] 띄어쓰기 수정 <변경 전> 내려 졌으나 <변경 후> 내려졌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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