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776 |
---|---|
한자 | 李拭 |
영어공식명칭 | Lee Sik |
이칭/별칭 | 청지(淸之),손암(損菴)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성봉현 |
[정의]
조선 전기 성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청지(淸之), 호는 손암(損菴)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의 5대손으로, 장양도정 주(長陽都正 儔)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남원부사 이승상(李承常)이며, 어머니는 민관(閔寬)의 딸이다.
[활동사항]
1545년(명종 1) 형 이증(李拯) 및 이양(李揚)과 더불어 진사시에 연벽(聯壁)하고, 선략장군(宣略將軍) 재임 때인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였다. 1554년 예문관검열이 되고 이어 승정원 주서, 홍문관 저작(著作), 경연청 설경(說經)을 역임하였다. 1559년(명종 14) 참상(參上)으로 승계되어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1560년(명종 15) 홍문관 수찬, 병조좌랑, 이조좌랑을 거쳐 다음 해 병조정랑이 되었다. 1562년(명종 17) 시강원 문학, 이조정랑 거처 다음해 검상,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1564년(명종 19) 홍문관 응교(應敎)를 지냈고, 다음해 당상(堂上)인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1570년(선조 3)에는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72년(선조 5) 황해도감사를 거쳐 1574년에는 이조참의와 대사간이 되었다. 1579년(선조 12) 대사헌에 있을 때 동서분당이 일어나자 정희적(鄭熙績) 등과 함께 서인의 등용을 막으려는 주장을 폈다가 체직되어 부제학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대사헌이 되자 서인들이 10년전 황해 감사 당시의 근무가 근면하지 못했다고 거론하자 사임하였다. 1583년(선조 16) 대사헌, 승지, 대사간, 부제학을 두루 역임한 다음 1586년(선조 19) 이조참판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나 행호군(行護軍)의 국록(國祿)을 받았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외암집(畏菴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