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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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大年 |
이칭/별칭 | 경로,사암,충정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전기 성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로(景老), 호는 사암(思菴)이다. 증 호조참판 정비(鄭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직(司直)을 지낸 정형운(鄭亨耘)이고, 아버지는 예문관대교 정전(鄭荃)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居昌愼氏)로 증 이조판서 신극정(愼克正)의 딸이다. 부인은 이인홍(李仁弘)의 딸이다.
[활동 사항]
1531년(중종 26) 사마시 생원과에 합격하고 1532년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관직은 예빈시 주부를 거쳐 지평(持平), 장령(掌令), 부교리(副校理), 집의(執義), 직제학에 이르렀다. 1542년 감찰로서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 부제학이 되고, 우승지 등을 거쳐 명종 때 황해도관찰사, 형조참의, 병조참의, 경기도관찰사, 호조참판, 한성부윤,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때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내고 1572년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575년 다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권신 윤원형(尹元衡)이 첩으로 정경부인(貞敬夫人)을 삼은 데 대한 사실 여부를 밝히라는 왕명을 받들고 조사하던 중 윤원형이 이를 알고 뇌물로 이를 무마하려 하자 완강히 거절하여 사람들이 후사(後事)를 두려워한 일도 있었다.
선조 초에 육조의 장을 추천하라는 왕명이 있자 모두가 서슴없이 그를 추천할 만큼 명망이 있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봉해졌다.
[묘소]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소와 신도비는 성남시 중원구 신흥동 옹정촌에 있었으나 신도시 개발로 1986년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오미마을로 이장하였다. 성남 일대에 흩어져 살았던 동래정씨들은 모두가 사암공의 후손들이다.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원부리 동래정씨 사암공파 묘역에 1640년(인조 18)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이 신도비는 유형문화재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노수신이 짓고, 오준이 썼으며, 김광현이 비석의 제액(題額)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