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0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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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東亮 扈聖功臣敎書 |
이칭/별칭 | 호성공신이등박동량(扈聖功臣二等朴東亮)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운중동 490-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주영 |
작성 시기/일시 | 1604년(선조 37) - 박동량 호성공신교서 작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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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1년 3월 8일 - 박동량 호성공신교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0호 지정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운중동 490-8] |
성격 | 공신교서 |
관련 인물 | 박동량|박태만 |
발급자 | 공신도감 |
수급자 | 박동량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선조가 박동량에게 내린 녹훈 교서.
[개설]
「박동량 호성공신교서」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한양에서 의주까지 모신 박동량(朴東亮)[1569~1635]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봉하고 내린 공신교서로 후대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2011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제작 발급 경위]
1604년(선조 37)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공적에 따라 신하들을 호성공신·선무공신(宣武功臣)·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봉했다. 박동량은 한양에서 의주까지 임금을 정성을 다해 모신 공으로 호성공신이라는 작위를 받고 공신교서를 받았다. 공신교서는 공신 업무를 담당하던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제작했다. 박동량의 호성공신교서 원본은 병자호란으로 유실되어 1680년 숙종이 보사공신(保社功臣) 교서를 발급할 때 다시 제작되었다.
[형태]
「박동량 호성공신교서」 표제는 비단으로 제작되어 있고, ‘호성공신이등박동량(扈聖功臣二等朴東亮)’이라고 적혀 있다. 내지는 명주에 붉은색으로 선을 그었으며[계선(界線)], 변란(邊欄), 본문은 해서체로 작성되었다. 배면에는 첨지가 붙어 있다.
[구성/내용]
「박동량 호성공신교서」의 본문은 일반 공신교서와 같이 ‘교(敎)+공신호+품계+관직+성명+서(書)’로 시작하고, ‘왕약왈(王若曰)[왕이 이르노라]+공적 및 포상+고자교시 상의지실(故玆敎示 想宜知悉)[이로써 교시하니 잘 알 것으로 여긴다]’ 라고 쓰여 있다. 그 다음에 공신 86인의 명단을 나열했다. 호성공신은 1등 이항복(李恒福) 등 2인, 2등 신성군(信城君) 이후(李珝) 등 31인, 3등 정탁(鄭琢) 등 53인이다. 박동량은 2등 공신으로 17번째에 이름을 올렸다. 마지막에 ‘만력삼십이년시월일(萬曆三十二年十月日)’이라고 발급일이 적혀 있고, 그 위에 어보인 시명지인(施命之印)이 날인되어 있다. 작은 글씨로 재발급하게 된 경위도 적혀 있다.
배면의 첨지에는 이춘영(李春英)[1563-1606]과 박태만(朴泰萬)[1642-1689]의 이름이 있는데, 이춘영이 원본 공신교서를 지었고 후대에 재발급을 하면서 박동량의 후손인 박태만이 적었다는 의미이다.
[의의와 평가]
「박동량 호성공신교서」는 70년 후에 발급되었기에 원본과 차이가 있다. 공신교서 원본에는 공신 명단 중 ‘정원군 부(定遠君 琈)’가 있는데, 재발급된 교서에는 ‘원종대왕휘(元宗大王諱)’라고 적혀 있다. 공신교서 재발급 시기가 정원군이 ‘원종(元宗)’으로 추존된 이후였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원본과 재발급 시기 사이의 역사적 변화를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시대의 녹훈 제도와 녹훈 문서를 연구하는 사료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