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9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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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노현 |
상대원은 잘 사는 동네였고 은행동은 못사는 동네였다. 상대원공단이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69년도 70년도에 철거민들이 들어와 천막촌을 형성할 때만 해도 상대원동이 이렇게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생각치 못했다. 처음 철거민이 들어왔을 때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동네였다. 아니 오히려 어린 궁씨에게 그건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처음에 철거민들 들어와 갖고 군용텐트 촥 쳐갖고 거기다가 한 가옥씩 집어넣고 준 거야. 줄 쫙쫙 쳐서, 여기 니네 땅 여기 니네 땅 해갖고. 여기는 지금 분양지들이 다 그런 식이거든요. 상대원동 삼동 분양지 이동 분양지 옛날에 그랬죠.”
당시 이 지역 국회의원은 차지철 씨였다. 차지철하면 한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하기도 했었다. 10.26 당시 대통령과 함께 김재규의 총에 죽을 때까지 한 시대의 권세를 누리던 사람이었다. 상대원을 포함한 성남 지역은 그 사람의 영향이 강하게 미치던 곳이다.
“성남 광주 여주 이천 이쪽으로 해서 차지철 씨가 국회의원 했었죠. 차지철 씨가 그런 부분은 내가 잘 모르겠는데, 혜택은 좀 주지 않았나 그런 생각은 가져요. 옛날에 여기 공단 같은 경우에 기념식하고 그러면, 뻥! 하는 폭죽. 어렸을 땐 진짜 되게 무섭더라고. 그렇게 해서 상대원이 변화되어 왔고, 진짜 아까 말씀드린대로 우리 집 앞에서 이리 이사 내려오면서 공단이 진짜 한참 활성화됐을 때는 그 많던 사람들 지금은 다 어디 갔는지.”
궁씨는 상대원 일대가 철거민 천막촌에서 공단 지역으로 대변신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기억 속에서는, 어린 시절에 보았던 천막촌 풍경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잘 나가던 시절 상대원의 생동과 활력이 또한 어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세월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시대를 풍미하던 권력자가 총소리에 지듯이, 상대원의 활기도 덧없이 시들어갔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쪽이 개방되면서 상대원공단에는 빈 공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상대원은 다시 쇠락의 세월을 맞이해야 했고, 궁씨는 다시 한 번 그것을 지켜보게 되었다. 물론 지금 상대원에는 벤처빌딩이다 해서 다시 예전의 활력을 찾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인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궁씨가 보기에는 그런 시도들이 거인의 쓸쓸한 뒷모습 정도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