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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리 친목회 사람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9116
지역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장노현

염씨는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 어려울 때는 어려워서, 장사가 잘 될 때는 바빠서 못 다녔다. 장사하고, 돈 버는 일 외는 별다른 취미도 여가생활도 없었다. 친목회 일 이외에는, 시장 밖 나들이를 하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85년도에 상가 사람들이 모여 한우리라는 친목회를 만들었다. 꽃집 사장님도, 고춧집 사장님도, 옆에 앞에, 앞에 옆에 다 해서 열 몇 사람이었다. 고향을 따져보면, 호남 사람이 많아서 진도가 세 사람, 여수가 두 사람, 장흥, 부안, 목포, 영암이 각각 한 사람이었고, 경상도 청송 하나, 충청도 둘, 그리고 염씨는 경기도 포천이었다. 친목회의 활동은 계원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일이 큰 부분이었다. 특히 계원들 집안에 초상이 나면 계원 모두 장지까지 따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상대원 이쪽으로 다가는 호남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무슨 때 되면, 그때 당시만 해도 초창기에는 차량도 없고 하니까, 봉고차 하나 빌려서, 밤에 장사 끝나고 거기까지 가죠. 한 아홉시 열시까지, 여기서 열시쯤 해서 출발을 하는가 봐요. 그러면 거기 가면은 거의 새벽 두 시, 세 시 그때쯤 들어가기도 하고.”

상가에 조문하러 밤길을 도와 지방을 다녀오는 일이 여름휴가를 대신했던 셈이었다. 물론 친목회에서 야유회를 가기도 했지만 몇 년에 한번 정도에 그쳤다.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도 제대로 된 외출을 해 본 적이 없다. 이모를 따라 몇 번 다녀온 놀이공원 외출이 전부였다. 염씨는 그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고 미안한 일이다. 또 공부를 제대로 살펴주지 못한 것도 미안한 일이다.

“지금도 애들한테는 너무너무 미안해요. 애들 공부하는 것도 못 봐주고. 애들이 그렇게 머리가 나쁘진 않았었는데 그렇게 공부를 잘하질 못했어요. 우리 딸내미는 그런대로 그래도 4년제 대학으로 갔으니까 나은데, 아들내미는 겨우 전문대 갔어요. 기초가 초등학교 때 누가 봐주는 사람이 없고 하니까 못 갔는데. 처제들 애들한테 신경써 주는 거 보면은 그게 너무너무 많이 부러워요.”

어려서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그러기 위해 무조건 돈을 버는 것을 지상과제로 여겨 온 삶이었다. 염씨는 다시 살아보라고 하면 그렇게는 안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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