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901083
한자 鹽夫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시흥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시지은

[정의]

경기도 시흥 지역의 군자염전소래염전에서 소금을 채취·저장·운반하는 등의 염전 노동을 했던 사람.

[개설]

시흥 지역의 염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자본으로 개발되었다. 군자염전은 1924년 오이도정왕동 일대 해안가를 중심으로, 소래염전은 1936년 월곶동·장곡동·방산동·포동 일대에 형성되었다. 시흥의 염전 개발은 시흥의 마을 생성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3.1운동이 있던 해에 대거 유입된 중국 산둥성[山東省]의 노동자들과 남한보다 일찍 염전 기술을 익힌 평안도 사람들이 군자염전 축조 사업 때 집단으로 남하해 와서 마을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정왕동 해안가의 평안촌과 그 남동쪽의 염부사마을군자염전에서 일하는 염부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며, 신촌은 소래염전을 만들 때 염부를 위해 사택을 지은 후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었다.

[내용]

시흥 지역의 염전은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드는 천일염(天日鹽)을 생산했기 때문에 일조량과 강우량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염판에 가둔 바닷물의 염도가 24도가 되어야 소금이 되는데, 보통 아침이면 염도가 22도이고 정오쯤이면 24도, 저녁 무렵이면 28도가 되기 때문에 오후에 채렴(採鹽)[소금 걷기]을 하려면 물을 섞어서 염도를 계속 조정해야 한다. 그에 따라 염전 노동은 물 푸기, 물 조정하기, 소금 거두기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물 푸기는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 염도가 높아진 염전의 바닷물을 웅덩이 창고에 모았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물레방아 같이 생긴 수리채로 퍼내는 작업이고, 물 조정하기는 물을 빼거나 희석시키는 것으로 소금의 염도를 조정하는 것이다. 소금 거두기는 넓적한 널빤지인 대파[소금물을 미는 고무래]로 소금을 밀어 모아서 양쪽에 광주리가 달린 목도에 담아 어깨에 메고 소금창고에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염전은 1호가 약 10정보, 즉 3만 평[약 9만 9174㎡] 넓이였다. 각 호마다 소금창고가 1~2개 동씩 있었으며 100정보[약 99만 1736㎡]를 1구라고 하였다. 염전 노동자의 직책은 염부, 난치반장, 부반장, 반장, 염부장, 감독으로 구분되었다. 염부는 수리채로 물을 푸거나 목도로 소금을 나르는 등의 일을 하며 경험과 능력에 따라 상염부와 하염부로 나누기도 하였다. 난치반장은 바닷물을 염판까지 내려주는 역할을 하면서 물을 조정하는 일을 하였고, 부반장은 염판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반장은 1호당 1명꼴로 있어서 염도 측정 및 감독을 했으며, 염부장은 40정보[약 39만 6694㎡] 정도를 감독하였다. 감독은 1구 정도를 총괄하는 책임자를 말한다.

염전 노동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3월에서 10월까지이다. 소금이 나는 시기는 4월에서 6월이므로 장마철인 7월과 8월은 쉬고 다시 10월까지 일하는 식이어서 염부들은 염전 노동과 농업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황]

1960년대까지 성행했던 시흥의 천일 제염업은 서서히 쇠퇴하여 1996년 완전히 폐쇄되었다. 2003년부터 소래염전 자리에 조성된 시흥갯골생태공원에 염전 체험장이 마련되어 역사와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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