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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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浦 |
이칭/별칭 | 도시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 15-7번지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변남주 |
폐지 시기/일시 | 1980년 - 도포 영산강 하굿둑 완공으로 소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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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 지역 | 도포 -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 15-7번지[N34° 49′40.8″ E126° 38′26.0″] |
성격 | 포구 |
관련 문헌 | 『나주목 읍지』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에 있었던 포구.
[개설]
도포는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에 있었던 포구로 조선 시대 포구명은 도시포(都市浦)였으며 나주에 속하였다. 조선 시대에 전국의 호수(戶數)와 인구수를 기록한 『호구 총수(戶口總數)』와 여러 고지도에는 도시포라 기록되었다. 도포리 도포는 조선 후기에는 중요한 상항(商港)으로 발전하였는데, 제창포(濟倉浦), 영강포(榮江浦), 삼포(三浦)와 함께 나주에서 상선이 정박하는 4대 포구 중 하나였을 정도로 번성하였다.
[명칭 유래]
도포는 도포 마을과 포구 주변에 형성된 장시(場市)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듯하다.
[형성 및 변천]
현재는 영암군에 속하나 조선 시대에는 나주목 종남면에 속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영암군으로 이속되었다.
도포리 도포에는 주로 어선인 중선배나 고기를 파는 상고선(商賈扇)이 드나들었다. 당시 포구 규모는 「호남 연해 형편도(湖南沿海形便圖)」에서 알 수 있는데, 포구는 서북풍 피항지로 10여 척을 수용할 수 있었다. 영산강 하굿둑으로 물길이 차단되기 전인 1970년대까지 배가 들어왔다. 항상 40~50척이 붐벼 배댈 곳이 없을 정도였다. 경상도의 상어잡이 배, 금강 웅진의 조깃배 등도 들어와 선창가는 상시 북적거렸다.
지금 도포 마을의 규모는 100호 정도에 불과하나 1980년대 초에는 300호 정도였으며, 도포면사무소와 파출소의 소재지였다. 오일장은 5의 배수 일에 열렸으며, 해물이 많이 나왔다. 당시 도포 사람들은 해물 도매업을 하였는데, 어선에서 고기를 받아 시종면, 영암읍 등의 소매상들과 거래하였다.
도포는 1980년 영산강 하굿둑 축조로 바닷물의 유입이 차단되자 포구 기능이 정지되었다. 포구 기능이 정지되자 면사무소와 지서도 구학리로 이동하였다. 이어서 오일장도 서서히 쇠락하다가 1990년대에 완전히 소멸되어 옛 상점들의 흔적만 찾을 수 있다. 한편 어촌이었을 당시 도포리의 번영된 모습은 도포제 줄다리기에서 엿볼 수 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 15-7번지의 남쪽에 있었다.
[관련 기록]
“제창포, 영강포, 삼포, 도시포(濟倉浦 榮江浦 三浦 都市浦)”[『나주목 읍지(羅州牧邑誌)』 선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