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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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知夢 |
이칭/별칭 | 민휴(敏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최연식 |
출생 시기/일시 | 907년 - 최지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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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924년 - 최지몽 왕건에게 발탁 |
활동 시기/일시 | 980년 - 최지몽 대광·내의령·동래군후·주국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982년 - 최지몽 홍문숭화치리공신에 봉해짐 |
몰년 시기/일시 | 987년 - 최지몽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994년 - 최지몽 경종의 묘정에 배향 |
출생지 | 최지몽 출생지 -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리|동구림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낭주 |
대표 관직 | 상주국 |
[정의]
고려 전기 영암 출신의 문신.
[개설]
최지몽(崔知夢)[907~987]의 원래 이름은 최총진(崔聰進)이고, 영암 구림 출신이다.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했으며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도 정통하였다. 924년(태조 7) 18세 되던 해에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발탁되었다. 왕건의 꿈을 삼한 통일의 길몽으로 해석하여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후 왕건의 총애를 받으면서 측근 참모로 활약하였고, 후삼국 통일의 중추 역할을 담당하였다.
[가계]
본관은 낭주(朗州). 아버지는 원보(元甫) 최상흔(崔相昕)이며, 최현동(崔玄同)과 최회원(崔懷遠) 두 아들을 두었다.
[활동 사항]
최지몽은 924년 왕건에게 발탁되어 공봉직(供奉職)에 등용되었다. 945년(혜종 2)에는 사천관(司天官)으로 있으면서 점을 쳐 왕규(王規)의 혜종 암살 계획을 감지한 뒤 이를 왕에게 알리고 거처를 옮기게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하였다. 정종이 즉위한 후 최지몽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노비와 안마(鞍馬)·은그릇 등을 상으로 받았다. 64세 되던 해인 970년(광종 21)에 왕의 귀법사(歸法寺) 행차에 호종하였다가 술에 취해 예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여 외걸현(隈傑縣)으로 쫓겨나 무려 11년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렀다.
980년(경종 5)에 다시 개경으로 복귀해 대광(大匡)·내의령(內議令)·동래군후(東萊郡侯)·주국(柱國)에 임명되었고, 식읍(食邑) 1천 호와 은그릇·비단 이부자리·휘장·옷·말·복두(幞頭)·무소뿔 띠를 하사받았다. 이듬해인 981년 왕승(王承)의 역모를 적발하였고, 그 공로로 어의(御衣)와 금대(金帶)를 상으로 받았다.
최지몽은 76세 되던 해인 982년(성종 1)에 좌집정(左執政)·수내사령(守內史令)·상주국(上柱國) 칭호를 덧붙이고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에 봉해졌으며, 부모에게도 작위가 내려졌다. 984년(성종 3) 78세의 노령을 이유로 세 번이나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고, 조참(朝參) 면제라는 특별 조치와 함께 내사방(內史房)에서 정사만 보라는 명을 내렸다. 최지몽은 987년(성종 6)에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상훈과 추모]
최지몽은 사후에 민휴(敏休)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태자태부(太子太傅) 태사(太師)에 추증되었다. 994년에는 경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