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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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兵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정윤미 |
[정의]
1895년에서 1910년 사이 전라남도 영암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
[개설]
의병은 국가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 무력 항쟁으로 이를 타개하고자 각 지방의 유생과 농민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으로 조직한 군대이다. 항일 의병의 시작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한 반일 감정에서부터 출발하였는데, 호남 지역의 경우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의병 항쟁 참여자가 많지 않았다.
영암 지역에서 의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이후이다. 특히 1906년 4월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거병한 뒤 전국의 사민(士民)들에게 궐기를 촉구하는 격서를 보낸 것이 전라남도 의병의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1907년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강제 해산되면서, 전국의 의병 항쟁은 일본과의 전면전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1909년 목포의 일본인 상업 회의소에서 전라남도 의병을 조속히 진압해 줄 것을 통감부에 호소하면서,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의 의병을 주된 탄압 대상으로 하여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의병 활동은 크게 약화되었고, 일부 의병들은 만주와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하여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주요 활동]
호남에서는 대한제국 말기까지 가장 왕성한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 타 지역 의병 활동의 기세가 약해진 후에도 최후까지 활발한 전투 활동을 지속하였다. 여러 의병대가 영암 지역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으며, 영암 출신의 많은 인사들이 의병대에 합류하거나 스스로 의병대를 조직하여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함평에서 거의한 심남일(沈南一) 의진과 박사화(朴士化) 의진 등에 합류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들이 많았다.
영암 지역과 관련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인물은 곽재구(郭在九)·김선중(金善仲)·김성재(金聖載)·김치홍(金致洪)·나성화(羅成化)·박민홍(朴民洪)·박사화·신예교(辛禮敎)·양방매(梁芳梅)·유시연(柳時淵)·정관오(鄭官五)·이덕삼(李德三)·이복근(李復根)·이화삼(李化三)·임영화(林永化)·정낙중(鄭洛中)·최병손(崔秉巽)·최우평(崔羽平)·추기엽(秋琪燁) 등이다. 이 가운데 김선중·김치홍·유시연·이복근·정관오 등은 영암 출신으로 일본 헌병이나 군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며, 대부분 전투 과정에서 순국하였다. 영암 의병 가운데는 양방매의 사례처럼 여성의 몸으로 항쟁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의의]
의병 항쟁은 우리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과 자주 정신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특히 전라남도에서는 최후까지 의병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영암 출신의 많은 인사들이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