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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050
한자 吳慶履
이칭/별칭 중화(仲和),소포(素圃)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윤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13년연표보기 - 오경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49년 - 오경리 승정원 가주서 제수 받음
활동 시기/일시 1882년 - 오경리 돈녕부 도정 제수 받음
활동 시기/일시 1883년 - 오경리 공조 참판 제수 받음
몰년 시기/일시 1893년연표보기 - 오경리 사망
사당|배향지 아산사 -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 은곡리 은곡 마을지도보기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해주
대표 관직 돈녕부 도정|공조 참판

[정의]

조선 후기 영암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개설]

오경리(吳慶履)[1813~1893]는 영암군 학산면(鶴山面) 은곡리(隱谷里)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영암 서호면 구적동정사(球積洞精舍)에서 수학하였고, 18세 때에는 영암 구림 문수암(文殊庵)에서 수학하였다. 영암에 거주하다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고종 때 공조 참판을 지냈다.

[가계]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화(仲和), 호는 소포(素圃)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을 지낸 오재익(吳在翼)이며,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정채(挺采)의 딸이다.

[활동 사항]

오경리는 1849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회시(會試)에 급제, 승정원 가주서(承政院假注書)가 되어 관직에 진출하였다. 철종 때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이조 정랑,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봉화 현감을 역임하였다.

오경리고종 때 사간(司諫)으로 재직하면서 「진시폐소(陳時弊疏)」·「청저양무재소(請儲養武材疏)」 등을 상소하여 시폐(時弊)의 시정과 제도의 개혁 등을 시행토록 하였고, 최익현(崔益鉉)안기영(安驥泳) 등을 공박한 권정호(權鼎鎬)·백규섭(白奎燮)을 탄핵하여 벼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고종오경리의 상소를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그에 따른 합당한 처분을 지시하였다. 오경리는 1882년에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이듬해 공조 참판으로 승진하였다.

[학문과 저술]

오경리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1936년에 후손들이 시문집을 묶어 간행한 『소포 유고(素圃遺稿)』가 전하는데, 2013년 현재 국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오경리영암 학산면 은곡리아산사(雅山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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