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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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永川靑年同盟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 있었던 청년 운동 단체 연합체.
[개설]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는 3·1 독립 운동 이후 영천 청년회(永川靑年會)·영천 기독 청년회(永川基督靑年會)·영천 기독 여자 청년회·영양 청년회(永陽靑年會)·영천 구락부(永川俱樂部)·금호 청년회(琴湖靑年會)·신녕 청년회(新寧靑年會) 등이 조직되었다.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수용되면서 사상계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고 청년 운동을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하면서 1924년 조선 청년 동맹이 결성되었다. 따라서 영천 지역에서는 1927년 8월 영양 청년회가 해체되고 영천 청년 동맹(永川靑年同盟)이 결성되었다.
[설립 목적]
1927년 조선 청년 연맹(朝鮮靑年聯盟)이 “앞으로의 조선 청년 운동은 민족적 협동 전선의 선두가 되어야 한다”고 제창하였다. 영천 지역에서도 “국부적인 청년 운동을 조직적이고 전체적인 민족적 청년 운동으로 전개한다”는 목적으로 1928년 8월 3일 영천 청년 동맹을 결성하였다.
[변천]
1927년 8월 영양 청년회를 해체하고 영천 청년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33년 4월 영천 청년 동맹이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7년 8월 3일 영양 청년회를 영천 청년 동맹으로 변경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一. 국부적인 청년 운동을 조직적이고 전체적인 민족 운동으로 전개할 일.
一. 단일 동맹 구성의 일 과정으로 본회 조직 및 회명을 변경할 일.
一. 청년의 힘의 통일을 위해 현재 연맹을 해체하고 단일 청년 동맹을 조직케 할 일.
一. 회비 및 임시 부담금을 의무적으로 납부할 일.
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一. 동척 및 불이흥업회사 이민 반대.
一. 소작료 합리화.
一. 인신 매매 및 공사납 폐지.
一. 봉건적 허례 타파 및 여성 백정 고아 청소년에 대한 일체 차별 관념 철폐.
一. 조선인 교육에 조선어 사용과 조선 역사과를 실시케 할 일.
一. 보통 교육에 무산 아동 수업료 철폐.
一. 향교 재산을 모산 아동 보습 교육에 제공케 할 일.
一. 청총(靑總) 규약에 의하여 도연맹(道聯盟)을 조직할 일.
一. 영천 유치원을 본회에서 인수 관리토록 할 일.
一. 신간회 지회를 촉성케 할 일.
一. 소년 운동을 진흥토록 조력할 일.
一. 정리 및 통일 운동에 장애되는 단체의 해체를 촉진케 할 일.
一. 강좌 및 강연을 수시로 개최케 할 일.
영천 청년 동맹은 결성 이후 1927년 10월 29일 러시아 혁명일 기념 대강연회를 개최하였고, 1928년 7월 9일에는 실업 방지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28년 12월 26일 여자 야학을 개최하였는데, 청년 동맹의 책임위원 백신애가 주도하여 생도의 수가 3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1928년경 청년 동맹 간부들이 피체된 뒤 거의 유명무실하게 유지되어 오다가 1933년 3월 25일 해체하였다.
[현황]
1927년 8월 3일 영천 청년 동맹을 결성하였는데, 그 위원은 위원장 김석천(金錫天)을 비롯하여 위원으로 최우경·김금암·이호직·안병서·김종달·황동창·안병준·전상우·이찬규·이영기·이석호·백신애 등이 선출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천 청년 동맹은 영천 지역의 청년 운동 및 사회 운동을 지도함으로써 영천 지역 민족 해방 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