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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17
한자 近代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권대웅

[정의]

개항기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역사.

[개설]

우리나라에서의 근대(近代)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대한제국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학자에 따라서는 근대의 시점을 1876년(고종 13) 개항 이후로 보기도 한다.

[내용]

1. 대한제국기

현재의 영천 지역은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개혁으로 영천과 신녕이 모두 군이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고, 1896년 23부제가 폐지되고 13도로 개편됨에 따라 경상북도 영천군신녕군이 되었다.

1909년에는 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북안면 일대가 영천으로 편입되고, 입암곡(立岩曲) 일대가 포항시 청하면으로 편입되었다.

의병 전쟁(義兵戰爭)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甲午變亂)과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사건, 그리고 1895년 11월의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경상북도 지방에도 1896년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通文)과 격문(檄文)이 각 지역 향교를 중심으로 돌았는데, 영천향교(永川鄕校)도 예외가 아니었고, 현재 영천 향교에는 모두 네 건의 의병 통문과 격문이 남아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영천 지역에서도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였는데,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가 체포된 이후 중군장 이한구(李韓久)가 지휘하다가 1906년 7월 해산하였다.

그 후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재기하여 죽장·입암·포항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1907년 9월 초 입암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대장 정용기와 장령 다수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에 아들 정용기를 대신하여 대장이 된 정환직(鄭煥直)이 의병을 이끌다가 1907년 12월 청하에서 체포되어 순국하였고, 이후 최세윤(崔世允)이 1908년 7월까지 산남의진을 이끌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이 시기 계몽 운동은 신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근대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1908년 은해사(銀海寺) 승려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해창학교(海昌學校), 1908년 설립된 사립 영흥학교(永興學校)가 주목된다. 사립 영흥학교는 1909년 명륜학교(明倫學校)로 개칭하였다가, 1910년 봉명학교(鳳明學校)로 다시 개칭하였다.

2. 일제 강점기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체제를 구축하였다. 우선 일제는 1910년 9월 지방 관제에 따라 군수[칙임관], 군서기 및 기수[판임관]를 임명하여 지방 행정을 개편하였으며,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영천 지역의 신녕군영천군에 병합하여 14개 면으로 조정하였다. 그 후 다시 재편되어 영천면·청통면·화산면·신녕면·자양면·임고면·고경면·화북면·금호면·대창면·북안면 등 11개 면이 되었고, 1937년 영천면은 영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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