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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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嶒 |
이칭/별칭 | 사겸(士謙),완귀(玩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494년 - 안증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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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40년 - 안증 별시문과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53년 3월 21일 - 안증 사망 |
묘소|단소 | 안증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청호제산 |
사당|배향지 | 호연사 - 경상북도 영천시 도동 |
사당|배향지 | 완귀정 -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
성격 | 입향조 |
성별 | 남 |
본관 | 광주 |
대표 관직 | 사서|설서 |
[정의]
광주 안씨(廣州安氏) 경상북도 영천 입향조.
[가계]
안증(安嶒)[1494~1553]의 자는 사겸(士謙), 호는 완귀(玩龜)이다. 고조는 안강(安崗)이며, 증조는 전옥서(典獄署) 주부(主簿) 안숙양(安叔良), 조부는 인의(引儀) 안보문(安普文)이다. 아버지 사간(司諫) 안구(安覯)는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도이며, 어머니 진도 김씨(珍島金氏)는 사정(司正) 김저(金渚)의 딸이다.
부인 영양 최씨(永陽崔氏)는 도사(都事) 최숙강(崔叔强)의 딸이며,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 안종경(安宗慶)을 데려다 후사를 이었다.
[활동 사항]
안증은 아버지가 김종직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처음부터 벼슬에는 뜻이 없고 학문에만 심취하여 성리학의 이론을 깊이 터득하였다. 후일에는 성리학의 이론이 실제 생활과는 유리되는 점이 많음을 지적하고 실학 사상에 심취하였다. 결국 실학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벼슬길에 오르지 않겠다던 평소의 마음을 고쳐 1540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사서(司書)·설서(說書)가 되었다.
이로부터 후일 인종이 된 세자에게 학문보다는 정치 문제에 큰 비중을 두고 강론을 하였다. 그러나 병약한 인종이 즉위한 지 일 년도 못되어 승하하니 모든 백성은 반상에 관계 없이 엄격한 평등을 지향하는 민본사상을 주창한 공의 이상이 무산되었다. 또한 을사사화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목격하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인종의 태실이 있으며, 평소 보아둔 이곳 영천으로 내려와 완귀정(玩龜亭)을 짓고 유유자적하니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가 서로 안증의 지조를 칭송하는 시를 지어 주었다. 1553년 3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8권 1책의 『완귀실기(玩龜實記)』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琴湖邑) 구암리(龜岩里) 청호제산(菁湖堤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도동(道東)의 호연사(虎淵祠)에 제향되었으나 현재는 유허비만 남아 있고,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道南洞)에 안증이 건립한 완귀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