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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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권대웅 |
[정의]
1392년부터 1863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된 시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역사.
[개설]
조선 시대 영천군과 신녕현은 경상도 소속으로 별개의 지방 행정 단위로 존속하다가 일제 강점기 때 영천군으로 통합된 이래 현재 영천시 행정구역과 큰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
[연혁]
고려 시대 영주(永州)로 불렸던 영천은 조선 왕조 개국 후 1413년(태종 13) 작은 군현은 주(州)라는 명칭을 금지하고, 대신 천(川)과 산(山)을 사용하도록 명하자 ‘천’을 선택해 영천(永川)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토호가 많았던 영천은 예로부터 다스리기 어려워 명망 있는 문관을 골라 파견하였는데, 영천군은 1644년(인조 22) 영천 출신 군관 김석남(金碩南)과 심기원(沈器遠)의 역모로 한때 현으로 격하되지만, 1653년(효종 4) 다시 군으로 복원이 이루어졌고, 1704년(숙종 30)에는 영천 관할이던 와촌(臥村) 일대를 하양현(河陽縣)에 이관하였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신녕현은 영천의 속현이었으나 17세기 이후에는 행정구획 상 엄연히 다른 군현으로 나뉘어, 영천군은 종4품 군수가, 신녕현은 종6품 현감이 파견되는 고을이었다. 신녕현은 1395년(태조 3)에 이지현(梨旨縣)을 이속시키고 14개 속역을 거느린 역으로 장수도(長壽道)를 두어 신녕현의 소재지로 삼았다. 1497년(연산군 3)에 현감 길수(吉修)가 향리들을 너무 엄하고 사납게 다스려 호장 10명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현을 폐지하고 영천군에 소속시켰으나, 1503년(연산군 9)에 복현이 이루어졌다.
1592년(선조 25)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정세아(鄭世雅)·조희익(趙希益)·권응수(權應銖)·정대임(鄭大任) 등이 의병을 크게 일으켜 활동했는데, 영천성 복성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승리를 거둔 중요한 전투로, 영천과 경상좌도의 여러 읍 보존에 크게 기여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힌다.
1789년(정조 13) 면리제(面里制)로 통일되면서 영천은 22개 면 291개 동으로, 신녕현은 8개 면 95개 동으로 개편되었으며, 갑오개혁 때 다시 지방제도 조정이 이루어져 13도 체제하에 7부 1목 331군으로 세분하였다. 당시 경상북도는 41개 군으로 영역의 대소에 따라 5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영천군은 2등급, 신녕군은 4등급이었다. 영천은 좌병영 소속의 경주 진관 소속으로 군수가 동첨절제사를 겸임했으며, 신녕현은 대구 진관 소속으로 절제도위를 겸직하였다. 『영천읍지』에 나타난 영천 군액은 8,314명, 신녕현은 2,813명으로 나타나 있다.
일제 강점하인 1913년 행정구역의 개편과 통폐합 조치로 신녕군을 비롯하여 13개 면을 영천군에 합속시켰다.
[경제와 산업]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영천 지역은 토질은 비옥·척박이 반반이었다고 히며, 영천의 농지는 7,432결로, 논이 10분의 4, 신녕은 2,047결로 논이 3분의 1이라 하였다. 논의 비율로만 보았을 때 경상북도권에서는 흥해와 함창 다음으로 높은 비율인데, 이는 영천 지역의 발달된 수리 시설과 연관이 있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영천에서 생산된 주요 토산물은 벼·보리·기장·콩·무명·마·상(桑)·은구어(銀口魚)·황어(黃魚) 등이었으며, 진공품은 인삼·건지황(乾地黃)·천문동(天門冬) 등 대부분이 약재로서, 영천은 오래 전부터 약업이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상품 경제의 발달과 영천은 지리적 요건으로 일찍부터 시장이 발달하였고, 19세기 초 영천 지역에는 황지원(黃池院)·신령읍·고현(古縣)·흑석(黑石)·원곡(原谷)·건지발(乾地發)·창총(倉總)·환귀(還歸)·남천 등의 5일장과 영천 읍내장이 있었다.
[교통과 통신]
영천 지역의 교통로는 장수도(長水道)에서 관할했는데, 장수역(長水驛)을 중심으로 영천~신령~경주~울산 역로, 경주~자인 방면, 청도~청송~청하 방면을 있는 역과 길이 있었다. 장수역 소속 인원은, 찰방 1명을 비롯하여 역리(驛吏) 200명, 남자 노역 170명, 여자 비역 86명이 근무하였으며, 장수도 소속 역과 길은 소역(小驛)과 소로(小路)에 속하는 역은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한편, 영천에는 역과 함께 조선 시대 교통로의 중요한 기능을 했던 원(院)으로, 제천원(濟川院)·남정원(南亭院)·요간원(要看院)·임하원(臨河院)·오읍포원(烏邑浦院)·적율원(赤栗院)·신원(新院)·요광원(要光院)·보통원(普通院)·길상원(吉祥院)·시천원(匙川院)·영등원(永登院) 등이 있었으며, 신령현에는 신원(新院)·양지원(陽地院)·갑현원(甲峴院) 등이 있었다.
봉수(烽燧)는 조선 시대에 중요한 통신 역할을 하였는데, 영천에는 동래 다대포진~동래산표~영천 성황당~안동 봉지산~충주~서울 목멱산[남산] 직봉과, 제2 봉수로서 방산·성황당·성산·소산·구도현 등 5개가 있었고, 신녕은 여음동(餘音洞) 1개가 있었다.
[교육 기관]
조선 시대 교육기관으로는 향교(鄕校)와 서원(書院)이 있었는데, 영천에는 관학 교육 기관인 영천 향교(永川鄕校)와 신녕 향교(新寧鄕校)가 있다.
영천 향교는 1435년(세종 17)에 대성전을 건립 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1908년 향교의 전답을 재정적 기초로 하여 사립 영흥학교를 설립하여 근대 교육을 꾀했다. 신녕 향교는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51년(명종 6)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86년(숙종 12) 지금 자리로 이건하였다.
또 다른 교육 기관인 서원은 1553년(명종 8) 정몽주(鄭夢周)를 배향자로 창건된 임고 서원(臨皐書院)과 1612년(광해군 4) 조호익(曺好益)을 배향자로 창건한 도잠 서원(道岑書院)이 향론과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특히 임고 서원은 소수 서원(紹修書院)에 이어 두 번째로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직접 서원 규모와 절목(節目), 그리고 봉안문(奉安文)을 찬술하는 등 설립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871년(고종 8) 서원 훼철 때 임고 서원을 제외하고 모두 훼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