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0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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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大任 |
이칭/별칭 | 중경(重卿),창대(昌臺)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553년 6월 4일 - 정대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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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3년 - 정대임 예천 군수에 임명됨 |
활동 시기/일시 | 1594년 - 정대임 무과에 급제 |
묘소|단소 | 정대임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오미동 삼귀마을 |
사당|배향지 | 창대서원 - 경상북도 영천시 과전동 |
성격 | 무인 |
성별 | 남 |
본관 | 영일 |
대표 관직 | 예천 군수 |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무인.
[가계]
정대임(鄭大任)[1553~1594]의 본관은 영일,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이며 1553년(명종 8) 6월 4일에 태어났다. 고조는 훈도(訓導) 정의소(鄭依韶)이며, 증조는 정이숙(鄭以淑), 조부는 정윤담(鄭允淡)이다.
아버지는 정용(鄭容)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로 증(贈) 참의(參議) 김응생(金應生)의 딸이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경주 김씨로 참봉(參奉) 김건(金乾)의 딸이다. 슬하에 2남을 두니 효력 부위(効力副衛) 정양보(鄭良輔)와 정양우(鄭良佑)이다.
[활동 사항]
정대임은 임진왜란에 분기하여 일어나 일신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창의하여 적을 토벌하였다. 당지산(唐旨山) 아래에 매복하여 적을 죽임이 헤아릴 수 없고, 또한 영천성에 주둔한 왜적에게 불로써 공격하여 모조리 태워 죽여 한 놈도 살아가지 못하였으니, 경상좌도의 온전함은 실로 이 한번 전투의 공이었다.
1593년(선조 26)에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제수되어 용궁, 비안의 적들을 추격하고 적들을 물리쳤고, 겨울에 병마사인 박진(朴晋)과 더불어 경주 태화의 적들을 공격하여 말을 내몰아 전투에 합류될 때 탄환이 갑옷을 뚫었지만, 오히려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았다. 경상좌도 일로(一路)의 적들을 일시에 궤산(潰散)시킴으로써 다시 침범하는 근심을 없앴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등제하였으나 품계가 오르지도 못하고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정대임은 스스로 전란의 뒤에 의로움을 떨쳐 자신을 잊었으며 적을 만나면 물러나지 않고 싸웠다. 언제나 적개심으로 스스로를 격려하되 공훈과 명예로써 마음을 삼지 않았다. 또한 적의 목을 친 공을 영천 군수인 김윤국(金潤國)에게 양보하였다.
전후의 사적은 그 당시의 병사인 박진의 장계(狀啓)와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가운데 상세하게 실려 있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5권 1책의 『창대실기(昌臺實記)』가 있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오미동(五味洞) 삼귀마을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추증되었다. 경상북도 영천시 과전동에 창대서원(昌臺書院)을 세워 제향하였으며, 경내 권상규(權相圭)가 찬술한 신도비(神道碑)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