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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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曺致虞 |
이칭/별칭 | 순경(舜卿),정우당(淨友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순홍 |
출생 시기/일시 | 1459년 - 조치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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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72년 - 조치우 사마시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94년 - 조치우 별시 문과에 급제 |
몰년 시기/일시 | 1529년 - 조치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797년 - 조치우 밀양의 오봉서원에 봉향 |
묘소|단소 | 조치우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 |
사당|배향지 | 유후재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창녕 |
대표 관직 | 대구부사 |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창녕 조씨(昌寧 曺氏)는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사위로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군된 조계룡(曺繼龍)을 비조(鼻祖)로 하고, 고려 태조(太祖)의 사위로 대락승(大樂丞)에 오른 조겸(曺謙)을 1세조로 하여 왔다. 하지만 구보(舊譜)의 대수(代數)가 같지 않아 13세(世) 소감(小監) 조송무(曺松茂)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조치우(曺致虞)의 고조는 조송무의 5세손 가선대부 좌익병마사 판희천군사(嘉善大夫左翼兵馬使判熙川郡事) 조신충(曺信忠)이니 영천 입향조이다. 증조는 덕원도호부사(德源都護府使) 조상명(曺尙明)이고, 조부는 부사직(副司直) 조경무(曺敬武)이다. 아버지는 군수(郡守) 조말손(曺末孫)이며, 어머니는 숙부인(淑夫人)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김한계(金漢啓)의 딸이다.
조치우의 자는 순경(舜卿), 호는 정우당(淨友堂)이며, 1459년(세조 5)에 태어나 1529년(중종 24)에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창원 박씨(昌原朴氏)로 사과(司果) 박혁손(朴赫孫)의 딸이며,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은 한림(翰林) 조효연(曺孝淵)과 충순위(忠順衛) 조은진(曺殷璡), 사위는 현령(縣令) 장세침(張世沈)이다.
[활동 사항]
조치우(曺致虞)는 뛰어난 문학과 곧은 절개로 이름이 높았다. 1472년(성종 3)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거쳐 장령(掌令) 및 사섬시(司贍寺)와 사옹원(司饔院) 정(正)을 지냈으나, 연산군(燕山君)의 정치가 문란한 것을 보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산수를 즐겼다.
중종(中宗)이 등극한 후 대구부사(大邱府使)로 부임하여 청렴결백한 정치를 행함으로써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되었으며, 뒤에 송덕비가 섰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왕으로부터 소학을 하사받았으며,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사직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슬픔이 지나쳐 3년 상기를 채우지 못하고 1529년 세상을 떠났다.
왕이 조치우의 청렴결백과 옥같이 맑은 덕을 표창하기 위해 옥비(玉碑) 2좌(座)를 하사하니 하나는 조치우의 묘 아래에 있으며, 또 하나는 부인의 묘소가 있는 경상남도 창원시 지개동에 있다.
[묘소]
조치우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 송청산(松靑山)에 있으며, 이휘령(李彙寧)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묘소 아래에 묘재인 유후재(遺厚齋)와 왕에게 하사받은 옥비(玉碑)가 남아 있다. 영천시에 조치우의 제사를 모시는 유후재(遺厚齋)가 있고, 1787년 밀양의 오봉서원(五峰書院)에 봉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