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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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四勿 |
이칭/별칭 | 역안(亦顔),곤봉(昆峯)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민욱 |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개설]
영일 정씨(迎日鄭氏)는 고려 시대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지낸 정습명(鄭襲明)을 시조로 하고 있다. 영일 정씨는 문과 급제 후 봉익대부행전공판서(奉翊大夫行典工判書)인 정인언(鄭仁彦)과 그의 아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 정광후(鄭光厚)부터 영천 전촌(錢村)에 옮겨 살았다.
[가계]
정사물의 자는 역안(亦顔), 호는 곤봉(昆峯)이며, 1574년(선조 7) 3월 16일에 태어나 1649년(인조 27) 2월 26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조는 정문영(鄭聞英), 증조는 승의랑(承議郞) 정세홍(鄭世弘), 조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유(鄭瑜)이다. 부친은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지내고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제수받은 정삼외(鄭三畏)이며, 모친은 증(贈) 정부인(貞夫人) 수원 김씨(水原金氏)로 참봉(參奉) 김공필(金公弼)의 딸이다.
첫째부인은 월성 손씨(月城孫氏)로 증(贈) 참의(參議) 손방(孫昉)의 딸이며 슬하에 1녀를 두니 사위는 홍여업(洪汝業)이다. 둘째부인은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서사원(徐思遠)의 딸이며 슬하에 5녀를 두니, 사위는 채지해(蔡之海)·손봉후(孫奉後)·이문해(李文海)·김흡(金潝)·김효달(金孝達)이다. 슬하에 후사(後嗣)가 없어 동생 정극후(鄭克後)의 아들 정야(鄭埜)로 뒤를 이었다.
[활동 사항]
정사물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아버지가 흥해에서 창의(倡義)하자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수합(收合)하는 데 많은 활약을 하였고, 또 화왕산(火旺山)의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많은 의병장들과 동맹하는 데 참가하였으며, 임진왜란 후 학궁(學宮)이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해지자 향리의 유생들과 합의하여 학궁을 세워 사풍을 진작시켰다.
정사물은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도 고을사람을 규합하여 창의하였으나 적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파하였다.
1643년 경주의 곤계봉(昆溪峯) 아래 정사(精舍)를 지어 ‘이의당(二宜堂)’이라 편액하고 아우 정극후(鄭克後)와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였다. 후에 학행(學行)으로 계공랑(啓功郞)과 사도시직장(司導寺直長)에 증직되었다.
[학문과 저술]
석판본인 4권 2책의 『곤봉집(昆峯集)』이 있다.
[묘소]
정사물의 묘소는 경주시 천북면(川北面) 물천리(勿川里) 수천(水川)에 있으며, 조형복(趙亨復)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경주에 이의당(二宜堂)과 묘소 아래 묘재인 물천재(勿川齋)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