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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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東弼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인호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10월 6일 - 김동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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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김동필 을사늑약 파기 및 을사5적 주살계획 전개 |
몰년 시기/일시 | 1944년 12월 16일 - 김동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김동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1년 - 김동필 추모비 건립 |
출생지 | 김동필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신덕리 |
소재지 | 추모비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신덕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동필(金東弼)은 1860년 지금의 영천시 신녕면 신덕리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세상을 떠났다.
[활동 사항]
김동필은 1904년 2월 일제가 러·일전쟁을 도발하며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여 침략 정책을 강화하자, 1905년 1월 동지들과 함께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일제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는 상소 운동을 전개했으며, 각국 공사관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공한을 보냈다.
또한 1905년 11월에는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규탄하는 운동을 벌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을사늑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십삼도유약소의 동지들과 함께 연명으로 올리어 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여 이완용 등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처단하려다가 발각되어 1907년 7월에 10년의 유배형을 당하였다.
1909년 이상설(李相卨)이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는 국내 대표로 김동필(金東弼)과 김진구(金鎭九)를 선정하여 극비리에 이들에게 여비를 보내어 상해로 나오도록 촉구했으나 일제의 연금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후손들이 영천시 신녕면 신덕리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