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1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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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學魯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인호 |
출생 시기/일시 | 1867년 10월 8일 - 이학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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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7년~1901년 10월 - 이학로 박동의 부대 부장으로 임명됨 |
몰년 시기/일시 | 1933년 10월 10일 - 이학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이학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1년 - 이학로 추모비 건립 |
출생지 | 이학로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
활동지 | 이학로 - 경상남도 일원[산청, 지리산, 가야산 일대] |
묘소 | 이학로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
소재지 | 추모비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본관 | 벽진 |
대표 경력 | 박동의 의병부대 부장 |
[정의]
한말 영천 출신의 의병.
[가계]
이학로(李學魯)의 본관은 벽진(碧珍). 1867년 지금의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서 태어났으며, 1933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이정봉(李禎鳳)과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학로(李學魯)는 1907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며 조·일 양국간에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하여 8월 1일을 기해 한국군대가 해산되자, 산청군 덕산의 의병장 박동의(朴東儀) 부대의 부장이 되어 경상도 전역에 걸쳐서 활동하였다.
1908년 8월 18일에 향도인 서병희(徐炳熙)와 함께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산청군 두량곡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전과를 올렸으며, 1909년에는 부하 11명을 거느리고 함안군 산외면 방목동에 사는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소각하였다.
그 후 서병희는 스스로 의진을 이끄는 의병장이 되어 경상도 일원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 10월 11일 구마산 주재소 일경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이학로는 1910년 이후까지 지리산, 가야산 등에서 계속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고 하는데 자세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묘소]
이학로의 묘소는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선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후손들이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